가을 노래 

                         이해인

하늘은 높아 가고
마음은 깊어 가네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을 키워 행복한
나무여, 바람이여,
슬프지 않아도
안으로 고여 오는 눈물은
그리움 때문인가

가을이 오면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멀리 있는 친구가 보고 싶고
죄없이 눈이 맑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고 싶네,

친구여,
너와 나의 사이에도
말보다는 소리 없이
강이 흐르네
이제는 우리
더욱 고독해져야겠구나.

남은 시간 아껴 쓰며
언젠가 떠날 채비를
서서히 해야겠구나

잎이 질 때마다
한 웅큼의 시(詩)들을 쏟아 내는
나무여, 바람이여

영원을 향한 그리움이
어느새 감기 기운처럼 스며드는 가을

하늘은 높아 가고
기도는 깊어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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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시로 여는 아침] 맨드라미

한국일보 | 입력 2011.06.28 09:29 |

 

 

 

                                                                                                    사진: 징소리 김성태(2011. 9.)


                           - 김명인

붉은 벽에
손톱으로 긁어놓은 저 흔적의 주인공은
이미 부재의 늪으로 이사 갔겠다
진정 아프게 문질러댄 것은 살이었으므로
허공을 피워 문 맨드라미
지금 생생하게 하루를 새기는 중!
찢긴 손톱으로 이별을 긁어대는
오늘의 사랑 뜨겁다
아침의 하늘에
날개 자국 하나 흘리지 않고
맨드라미 꽃봉오리들 지나가고 있다
푸르디푸른 판유리를 미는
시뻘건 맨살들, 하늘 벽에 파고든
핏빛 너무 선명해서
너도 쉬 지워지리, 잔상만으로 아득하리

 

느지막하게 알게 되는 아름다움도 있어요. 어릴 적 꽃밭에 핀 붉은 맨드라미를 보면 늘 이상했어요.

끝이 뭉툭 닳은 솔이나 빗자루를 공중으로 세워놓은 것처럼 생긴 꽃. 저런 못생긴 꽃을 왜 심지?

 다른 곱고 여린 꽃잎들은 하늘하늘거리며 창공을 날아다니는데.
우리를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해주는 천사의 흰 날개처럼 사랑이 다만 가볍고 환하기만 한 거라고 믿었던 시절이 지나고서야 알았어요.

그런 날개 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서 붉은 몸으로 하늘의 유리벽을 닳도록 문질러대는 사랑도 있다는 것을.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한해살이 풀인 맨드라미는 씨와 꽃을 말려 내장출혈을 막는 데 쓴대요.
핏빛으로 물들며 구불거리는 제 속을 치켜들고 버텨대다 문득 사라지는 못생긴 사랑,

 

그 아름다운 잔상만으로 이 여름의 뱃속이 아득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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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짓

               -오수일

 

 

손끝에 바람이 인다.
너, 어디서
그리운 몸짓에 옷을 벗는가.

세월이 바람 타고
허락 없이 입술을 포갠
오후.

멀찍이 떠가는 산야의
잠든 순이
그립다.

꽃 그늘에 실려 간
지금은 슬픈
사람.

너, 어디서
그리운 몸짓을 보내오고 있는가
손끝에 눈물 어린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 북한산 자락이 끝나는 성북동 기슭에 자리한 길상사는 한 때 우리나라 제일의 요정 대원각이 있었던 곳이다. 

      60년대 말 삼청각, 청운각, 대원각이 최고급 요정이었다.

       술과 음기(陰氣)를 팔던 자리가 부처님을 섬기는 절로 변한 것이 인연이라고나 할까.

      불가에서 가장 성스럽게 치는 연꽃은 가장 더러운 진흙에서 피듯이 이 절은 대원각 요정의 주인이었던

       김영한(불명 吉祥花)이 죽기 전 법정스님에게 기증하여 절로 탈바꿈한 것이다.

      김영한(1915~1999), 기명(技名)은 진향(眞香)이고 필명은 자야(子夜)이다. 그녀는 시인 백석을 지독히 사랑했던 기

      녀이며 백석 또한 그녀를 위해서 많은 연애시를 썼다. 백석이 북으로 떠난 후 38선 때문에 그와 생이별한 그녀는 백

      석을 잊기 위해 혼자서 대원각을 열었다. 우리나라 제일의 요정을 일구어 낸 여걸이었지만 백석이 죽도록 보고 싶으

      면 그녀는 줄 담배를 피워 댔다. 그 담배 연기가 이 가련한 여인을 그냥 두겠는가, 기어이 그녀를 폐암으로 몰아넣었

      다. 죽음이 임박해지자 김영한은 자신이 운영하던 당시 싯가 1천억원의 요정은 절에(법정스님의 '길상사), 2억원의 현금은 백석 문학상 기금으

      로 내 놓는다. 그리고 '내사랑 백석'(1995년 문학동네)과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은 이름'(창작과 비평)을 출간다.

       


          기자가 물었대,

          시루로 천억을 내 놓았는데 후회되지 않냐고,

          무슨 후회? 라고 반문했다나봐,

          그 사람이 언제 제일 생각나냐고?

          그랬더니

          사랑하는 사람 생각나는 데 어디 때가 있나!  

          그랬대요

          기자가 다시 물었대요,

          그 사람이 어디가 그리 좋으세요

          '천억이 그 사람의 詩 한 줄만도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를 쓸거야' 라고

           

          - 이생진 詩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에서 -

       

      삶이 무어냐고 묻고 싶거든 길상사를 찾아 가면 수목 우거진 언덕 한켠에 김영한의 비석 하나가 외롭게 서 있다.

      그 김여사 자야는 길상사가 문을 연지 2년만인 1999년 83세에 훌훌 서방 정토 세계로 떠난 여인이요, 백석을 위해 전

      생의 삶을 보낸 멋쟁이 여인이다.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에 뿌려졌다. 

      김영한은 가난한 탓에 약한 신랑에게 몸 팔려간 15살에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사이에 남편이 우물에 빠져 죽는 불운

      을 맞는다.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 끝에 눈물을 머금고 집을 나온 그녀는 기생의 길을 갈 수 밖에 없 

      었다. 가무와 궁중무를 배워 서울의 권번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할 정도로 시

      와 글, 글씨, 그림에도 재능이 뛰어난 미모의 기생이었다. 흥사단에서 만난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동경 유학까지

      떠나게 되지만 스승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서 함흥 감옥으로 찾아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대신 함흥 영

      생여고보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영어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 1936년 운명적으로 만난다. 

      함흥에서는 그가 교사의 신분으로 남의 이목도 있고 했기에, 백석이 김영한의 하숙으로 와서 함께 지내다 돌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김영한이 서울로 돌아가자 백석은 아예 그녀 때문에 학교에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와서 조선일

      보에 근무한다. 그리고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리고 서울과 함흥을 오가며 3년간의 동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백

      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 마땅하게 생각했고 강제로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켰으나 신혼 첫날밤부터

      도망치기를 여러차례, 부모에 대한 효심과 여인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백석은 괴로워 갈등하다가 이를 벗어나기 위

      해 만주로 도피하자고 제의한다. 그러나 그녀는 백석의 장래를 걱정하여 함흥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백석

      은 혼자 떠난다. 그때 백석을 따라 만주로 가지 않았던 실책으로 그를 비운(悲運)에 빠뜨렸다고 김영한은 늘 후회하

      며 살았다. 그 당시 백석의 심경을 나타샤를 인용해 노래한 詩가 대표적 연애시인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다. 

      백석(본명 백기행 1912~1955)은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도쿄로 건너가 영문학을 공부하고 1930년 조선일보에 시를

      투고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잘생긴 얼굴과 젠틀한 성품, 게다가 청산유수의 말솜씨로 미인들의 마음을 사로 잡

      았던 댄디보이(Dand boy)였다. 그러나 백석(白石)은 많은 여인들중 자야(子夜)만을 사랑하였으며 백석의 아름다운

      시(詩)는 시인과 기생의 정염(情炎)을 넘어서 깊고 넓은 그리고 애틋한 사랑의 실체를 느끼게 한다. 

      해방이 되자 백석은 만주에서 함흥으로 돌아왔지만 김영한은 이미 서울로 떠나버렸고 다시 그녀를 찾아 서울로

      가려 할 때는 38선이 그어져 그들의 사랑은 이승에서 잇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게 된다. 분단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서글픈 사랑의 기록이다. 그 후 백석이 북한 체제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90년대 중반까지 살았 

      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재북작가인 탓에 그의 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불교적인 영향을 받은 큰 시인이었다. 

      같은 하늘 아래서 영영 만날 수 없는 사랑, 이별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함일까. 그녀는 오로지 재산 모으는데 전념을

      하게 된다. 그러나 돈을 모을수록 허전함은 더하고 모진 세월마져 백석에 대한 사랑을 사그러들게 하지는 못했다.

      생전에 김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은 일체의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자야는

      백석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단 하나의 여인이었고, 그녀 또한 백석에 대한 그 사랑을 평생 올곧게 간직했던 여인이었다.

             

              [女僧(여승)] 

                                        백석

                

              여승은 함장하고 절을 한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 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山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山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 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이 詩는 기구한 삶을 살다 여승이 된 한 여인을 두고 쓴 것이나 웬지 김영한과의 사랑을

          예언적으로 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http://cafe.daum.net/bok22에서 옮겨 편집

           

           

          ----------------------------------------------------------------------

           

           

          무소유 삶을 살았던 생전의 법정스님

          http://cafe.daum.net/decoles/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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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시인선 0131] 최승자 시집

      『물 위에 씌어진』

       

      `물 위에 씌어진 3`

      “꿈인지 생시인지/ 사람들이 정치를 하며 살고 있다/ 경제를 하며 살고 있다/

      사회를 하며 살고 있다// 꿈인지 생시인지/ 나도 베란다에서/ 화분에 물을 주고 있다//

      (내 이름은 짧은 흐느낌에 지나지 않았다/ 오 명목이여 명목이여/ 물 위에 씌어진 흐린 꿈이여)//

      (죽음은 작은 터널 같은 것/ 가는 길은 나중에 환해진다)”

      나는 다시 돌아왔다

      -물 위에 씌어진 비본래적 실존의 허무

       

      한국 현대 여성시의 대표 시인 최승자가 다시 돌아왔다. 11년만의 성공적인 복귀 이후, 일년 반 만에 나온 일곱 번째 시집이다. 병원을 오가며 투병 중에 씌어진 여섯 번째 시집과는 달리 이번 시집『물 위에 씌어진』에 실린 60편의 시는 전부 정신과 병동에서 씌어진 것들이다.

      표독이 제거된 시는 물 위에 쓰인 시처럼 한 없이 여리고 위태롭다. 시인의 언어는 수없이 미끄러지며 결합과 분리를 반복한다. 마치 작은 터널에 들어온 것처럼 끊임없이 환유한다. 이로 인해 더욱 충만해진 의미들은 온전히 결합하며 ‘가볍게 떠오르는 그러나 깊은’ 최승자 시인만의 독특한 무의식의 언어를 보여준다.

       

      “폐허로 오시라 나의 아씨들이여/더욱 슬퍼하기 위하여 오시라 내 詩의 아씨들이여/고독과 슬픔은 한 뿌리에서 나오는 것을” 오랜 세월 고독과 슬픔으로 쌓아 올린 시인의 폐허는 아직도 짓지 못한 내 집이자 존재 그 자체이다. 허무와 허망을 너무 일찍이 알아버린 시인이 꿈꿔왔을 초월의 세계는 神을 통해 비로소 가장 불쌍한 현존재를 볼 수 있게 해준다. 우리에게 돌아온 시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현존재를 이해하는 것과 같다. “하이데거적 본래의 향기”를 꿈꾸는 시인은 경제적인 언어로 현대 문명의 비본래적 실존을 말한다.

       

      지금도 경기도 이천의 정신과 병원에 요양 중인 최승자 시인이, 누구보다 올곧은 시정신으로 세상을 향한 외로움의 몸짓을 처절히 노래하고 있다.

      긴 말이 필요치 않다. 그녀의 육성을 아래에 인용한다.

       

       

      [시인의 말]

      1. 이 詩集의 詩들 전부가 정신과 병동에서 씌어진 것들이다.

      2. 독자들은 갑자기 튀어나오는 神, 神할애비 등에 놀랄 수도 있겠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고, 노자와 장자를 따라가다가 맞부딪친 기이한 우연이라는 말만 더 보태자. 그렇긴 하지만 神, 神할애비 등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노자와 장자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神)마저 빠져 나갈 수가 없는 초거대물리학, 초거대집단심리학이다.

      3. 쓸쓸한 날에는 장자를 읽는다. 쓸쓸한 날에는 노자보다 장자가 더 살갑다. 그러나 더 쓸쓸한 날에는 장자도 有毒하다. 세상을 두루 살펴보아도 장자의 그림 떡이 있을 뿐 그것을 능가하는 금상첨화적인 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름다움이 없으면 쓸쓸해진다) 그렇게 쓸쓸해 할 때의 나는 始源病에 걸린 나이다. 정신분열증 환자가 始源病이라는 또 다른 증상까지 겹쳐 앓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그런 날에는 술을 천천히 마신다. 始源을 그리워하면서. 눈에 보이는 꽃들이 어제 생겨난 듯하고 동시에 천만년 전부터 그렇게 환하게 피어 있는 듯한 순수와 환희를 가득 풀어줄 어떤 始源性을 그리워하면서 술을 천천히 마시는 것이다.

      (하루 낮에도 천국과 지옥을 오락가락하는 게 詩人이 아니더냐)

       

      2011년 4월

      최승자

       

       

      [추천글]

      최승자 시인의 시를 읽으니 사람이 산다는 게 이렇도록 슬프구나 라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든다. 무언가 다 꿈결 같고 애달프다. 그래서 그지없이 아름답다. 한편, 최승자 시인은 사람의 정신이 가 닿을 수 있는 극한까지 치고 올라가, 아니 그것을 넘어서면서 예사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우주와 사람의 때묻고 얼룩지지 않은 발가숭이 모습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해서 이룩된 시의 풍경들은 어떤 것은 섬뜩하고 어떤 것은 황홀하고 또 어떤 것은 끔찍하다. 머리로 쓴 시에 길들여진 독자들에게 이 시집의 시들이 주는 충격과 감동은 클 것이다. 과연 시란 무엇일까,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신경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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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 도서관

                              최승자

       

      오늘도 하늘 도서관에서

      낡은 책을 한 권 빌렸다

       

       

      되도록 허름한 생각들을 걸치고 산다

      허름한 생각들은 고독과도 같다

      고독을 빼앗기면

      물을 빼앗긴 물고기처럼 된다

       

      21세기에도 허공은 있다

      바라볼 하늘이 있다

      지극한 無로서의 虛를 위하여

      허름한 생각들은 아주 훌륭한 옷이 된다

       

       

      내일도 나는 하늘 도서관에서

      낡은 책을 한 권 빌리리라

       

       

      너에게

      네가 왔으면 좋겠다.
      나는 치명적이다.
      네게 더 이상 팔게 없다.
      내 목숨 밖에는.
      목숨밖에 팔게 없는 세상,
      황량한 쇼 윈도 같은 나의 창 너머로
      비 오고, 바람 불고, 눈 내리고,
      나는 치명적이다.
      네게, 또 세상에게, 더 이상 팔게 없다.

      내 영혼의 집 쇼 윈도는 텅 텅 비어있다.
      텅 텅 비어, 박제된 내 모가지 하나만
      죽은 왕의 초상처럼 걸려 있다.

      네가 왔으면 좋겠다.
      나는 치명적이라고 한다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독보적인 자기만의 시언어를 확립하며, 기존의 문학적 형식과 관념을 보란 듯이 위반하고 온몸으로 시대의 상처와 고통을 호소해온 시인이다. 1952년 충청남도 연기에서 태어났다. 수도여고와 고려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했으며, 계간〈문학과 지성〉에 「이 시대의 사랑」 외 4편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등단했다. 최승자는 현대 시인으로는 드문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 박노해, 황지우, 이성복 등과 함께 시의 시대 80년대가 배출한 스타 시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2001년 이후 투병을 하면서 시작 활동을 한동안 중단했으며 2006년 이후로 요양하다 2010년, 등단 30주년 되는 해에 11년의 공백을 깨고 신작을 발표, 2011. 7월 경기도 이천의  정신과 병동에서 일곱 번째 시집 ‘물 위에 씌어진’(천년의시작)을 냈다.


      저서로 시집《이 시대의 사랑》,《즐거운 일기》,《기억의 집》,《내 무덤 푸르고》,《연인들》등이 있고, 역서로《굶기의 예술》,《상징의 비밀》,《자스민》,《침묵의 세계》,《죽음의 엘레지》,《워터멜론 슈가에서》,《혼자 산다는 것》《쓸쓸해서 머나먼》<물 위에 씌어진’>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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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새 /해탈-감태준  (0) 2011.04.02

       

                                                                                                        [함민복의 시로 여는 아침] 허수아비    한국일보 |

       

       

       


      허수아비 
                                                      이창기

      오늘도
      온종일
      까치 산비둘기와 함께
      콩밭에서 살았습니다

      늘 고만한 키
      생전에 입던 잠바
      색 바랜 운동모를 쓰고
      발치에서 보면
      누구라도
      신씨 노인이 이 땡볕에 또 밭에서 일하네
      라고 중얼대며 오갔을 겁니다

      화투놀이 끝에 격조했던 읍내 사는 친구 한 분은
      스를 타고 마을 회관 앞을 지나다
      비탈밭에 수그리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마음에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지켜보다
      끝내
      말을
      걸고
      말았
      답니 

       

       

      식전 고추말뚝 박는 소리에 개가 짖습니다. 밖으로 나가보니, 겨우내 뭉친 근육 풀고 한해를 같이 시작하자고 농부가 밭에 고추말뚝 침을 줄지어 꽂고 있습니다. '소리 나는 침은 처음 보네. 흙은 본래 과묵한데, 침엔 약한 것인가, 엄살인가.' 떠오르는 객쩍은 말을 거두고 길 아래 논 쪽을 바라다봅니다. 무논에 바지를 둘둘 걷고 정강이로 물밀며 들어가다가, 내년에도 다시 논에 들어올 수 있을까 생각하는지, 백로처럼 멈춰서며 허리 펴던 늙은 농부의 가는 다리 생각납니다.

      시의 행을 기하학적으로 배치해 허수아비 하나를 만들었네요. 죽은 신씨
      노인의 의상이 생전 신씨가 일하던 밭을 지키네요. 친구 한 분은, 보고 싶은 맘이 앞서서인가요, 눈이 침침해서인가요, 아니면 생전의 의상만으로도 신씨를 만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그리웠었나요, 끝내 허수아비에게 말을 걸기도 했었군요. 시 속 풍경이 쓸쓸하기도 하고 따듯하기도 하네요. 마치 이런 작별인사가 비탈밭에 울려 퍼질 듯 하네요.

      '이보게, 이제 좀 땡볕은 피하고, 쉬어가며 쉬엄쉬엄 일하게, 죽어서도 농사짓는 이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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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  함

                                                                     -  고 경 숙

       

                                                                그가 명함대신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주었네 

       건네받은 종이컵 얄팍한 팔락임에 하마터면 손을 데일 뻔 했고

      5할도 못 채운 커피의 단맛에 확 뱉어버리고 싶었는데,

       

        그가 쳐다보고 말했네 피곤할 땐 단 게 좋아요

       

        그의 땀냄새가 고스란히 컵에 지문을 찍고 노동으로 단련된 팔뚝 관절속으로 되돌아갔네 

      그의 몸에는 뿌리깊은 우화가 서식하는 듯 입을 벌릴 때마다 웃음이 튀어나왔네  

       손바닥으로  치자 거스름반환구에서 동전들이 놀라 떨어지네 

       싱긋 겸연쩍은 손가락 사이에서 은빛 커플링 가랑가랑 사랑을 발아시키고  있었네 

       나는 실망했지만 묻지 못하네

       

        경쾌한 거짓바람과 거짓인사가 악수를 하네 연락 주십시오!

      그를 기억하기 위해선 커피 냄새를 기억해야 하고,

      웃을 때 보았던 치열을 떠올려야 하네 

      내 것이 아닌 반지의 반짝임을 기억해야 하네

       

        그의 흐릿한 뒷모습을 기억해야 하네.

       

       

       

      고 경 숙

                                         
       
                                                1961년 서울 출생
                                          2001년 계간 '시현실'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1999년 제4회 하나.네디앙 인터넷문학상 대상
                                          2000년 제2회 수주문학상 우수상
                                          2008년 제3회 두레문학상 수상
                                           <난시(暖詩)>동인
                                          한국시인협회, 한국문인협회 부천지부,
                                          부천여성문학회, 시산맥, 두레문학회,
                                          서시동우회, 정표예술포럼 회원
       
                                           現 수주문학상 운영위원
                                           수주문학제 사무국장
                                           부천예총 기획위원
                                           부천신인문학상 운영위원
                                           부천대 사회교육원 문학전문위원
                                           부천문화원 편집위원
                                           다시올문학 편집위원
                                           두레문학 편집위원
       
                                            시집 <모텔 캘리포니아>(2004)
                                            <달의 뒤편> (2008)

       

      [출처] 명함/고경숙|작성자 자작나무

       

       

       

      고경숙 시집『달의 뒤편』. 2001년 '시현실'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고경숙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주변부의 삶과 풍경을 관찰한다.

       또한 마침표와 쉼표, 말줄임표 등의 문장부호를 차용해 생의 궤적을 이야기하면서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싶은 자신의 존재를 고민한다.

       

       

      '난시' 동인으로 활동 중인 고경숙 시인의 시집이다. 모텔 캘리포니아는 철지난 바닷가에 위치한 숙박업소이다.

      여행자의 임시 거주지에 지나지 않는 이곳에 모이는 사람들은 소외와 실패를 겪은 사람들이다.

      자의든 타의든 사회적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 그 주변부적 삶에서 시적 화자 역시 예외적이지 않다.

      입구만 있고, 출구는 막혀있는 막다른 현실에 대한 은유인 모텔 캘리포니아에서 시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의미에 대한 모색을 멈추지 않는다.

       

      철 새

                      - 감태준

       

      바람에 몇 번 뒤집힌 새는

      바람 밑에서 놀고

      겨울이 오고

      겨울 뒤에서 더 큰 겨울이 오고 있었다


      "한번 ……"

      우리 사는 바닷가 둥지를 돌아보며

      아버지가 말했다.

      "고향을 바꿔 보자"


      내가 아직 모르는 길 앞에서는

      달려갈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때,


      아버지는 바람에 묻혀

      날로 조그맣게 멀어져 가고, 멀어져 가는 아버지를 따라

      우리는 온몸에 날개를 달고

      날개 끝에 무거운 이별을 달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환한 달빛 속

      첫눈이 와서 하얗게 누워 있는 들판을 가로질러

      내 마음의 한가운데

      아직 누구도 날아 가지 않은 하늘을 가로질러

      우리는 어느새

      먹물 속을 날고 있었다.


      "조심해라, 얘야."

      앞에 가던 아버지가 먼저 발을 헛딛었다.

      발 헛딛은 자리,

      서울이었다.

       

       

      해 탈

                      - 감태준
       
      해탈이 어찌 내 품에 안기기를
      바라겠는가
       
      남한산성 가는 차 안에서
      차창 밖으로
      바람에 가지 씻고 서 있는 나무들을 본다
       
      아무 미련 없이
      남은 단풍잎을 털고 있는 느티나무 고목한테
      해탈이 찾아와 노는지
      빈손을 흔들어 보이며
      허허 웃고 있는 얼굴이 보인다
       
      나도 몸 가뿐하게
      버릴 것 버리고 나면
      해탈이 찾아와줄까?
       
      눈 반쯤 내려 감고
      무릎 위에
      두 손 가볍게 올려놓을 수 있을까? 

       

      감태준 1947 경남 마산 출생 1972 <<월간문학>>에 <내력>으로 등단
      1982 제2회 녹원문학상 수상, 1986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시집 <몸 바뀐 사람들> <마음이 불어 가는 쪽>

       

      고통을 소통으로 치유한 '이야기꾼' 박완서

       등단 41주년을 맞은 작가 박완서 씨가 22일 오전 6시17분 담낭암 투병 중 별세했다. 향년 80세.

      고인은 지난해 가을 담낭암 진단을 받고 수술 후 치료를 해왔으나 최근 급격히 병세가 악화돼 세상을 떠났다.

      1931년 개성의 외곽 지역인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중퇴하고,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현상공모에서 '나목(裸木)'이 당선되면서 비교적 늦은 나이인 40세에 소설가로 등단했다.

       

      전쟁과 분단 등 한국현대사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으며 청춘을 보낸 고인은 작가의 길로 들어선 이후

       

      자신의 깊은 상처를 되새기며 독자들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글을 써왔다.

      전쟁의 상처로 작가가 됐다고 고백한 그는 평생 시대의 아픔과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그렸다.

       

      사람과 자연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드러내며, 때로는 자본주의가 만든 황폐한 인간성을 통렬히 비판하기도 했다.

      '영원한 현역'으로 불렸던 고인은 왕성한 작품활동을 이어왔다.

       

      장편소설로는 '휘청거리는 오후' ' 서 있는 여자 '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미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 등이 있다.

      또 소설집 '엄마의 말뚝' '꽃을 찾아서' ' 저문 날의 삽화 ' ' 한 말씀만 하소서 ' '너무도 쓸쓸한 당신' '친절한 복희씨' 등을 냈으며,

       

      '나 어릴 적에' '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 ' '부숭이의 땅힘' ' 보시니 참 좋았다 ' 등의 동화집을 발표하기도 했다.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감싸는 수필집도 여러 권 출간했다. '세 가지 소원'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여자와 남자가 있는 풍경' '살아 있는 날의 소망' '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

       

      ' 어른노릇 사람노릇 ' '두부' '호미' 등이 있으며 지난해 7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펴내기도 했다.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만해문학상,

       

      인촌상, 황순원문학상, 호암예술상 등과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993년부터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했으며, 2004년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됐다.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했던 그는 2006년 문화예술계 인물로는 처음으로 서울대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유족은 장녀 원숙(작가), 차녀 원순, 삼녀 원경(서울대 의대 교수), 사녀 원균 씨 등 4녀와

       

      사위 황창윤(신라대 교수), 김광하(도이상사 대표), 권오정(성균관대 의대 학장), 김장섭(대구대 교수)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6호, 발인은 25일 오전이다. 장지는 용인 천주교 묘지. ☎02-3410-6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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