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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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 자락이 끝나는 성북동 기슭에 자리한 길상사는 한 때 우리나라 제일의 요정 대원각이 있었던 곳이다.
60년대 말 삼청각, 청운각, 대원각이 최고급 요정이었다.
술과 음기(陰氣)를 팔던 자리가 부처님을 섬기는 절로 변한 것이 인연이라고나 할까.
불가에서 가장 성스럽게 치는 연꽃은 가장 더러운 진흙에서 피듯이 이 절은 대원각 요정의 주인이었던
김영한(불명 吉祥花)이 죽기 전 법정스님에게 기증하여 절로 탈바꿈한 것이다.
김영한(1915~1999), 기명(技名)은 진향(眞香)이고 필명은 자야(子夜)이다. 그녀는 시인 백석을 지독히 사랑했던 기
녀이며 백석 또한 그녀를 위해서 많은 연애시를 썼다. 백석이 북으로 떠난 후 38선 때문에 그와 생이별한 그녀는 백
석을 잊기 위해 혼자서 대원각을 열었다. 우리나라 제일의 요정을 일구어 낸 여걸이었지만 백석이 죽도록 보고 싶으
면 그녀는 줄 담배를 피워 댔다. 그 담배 연기가 이 가련한 여인을 그냥 두겠는가, 기어이 그녀를 폐암으로 몰아넣었
다. 죽음이 임박해지자 김영한은 자신이 운영하던 당시 싯가 1천억원의 요정은 절에(법정스님의 '길상사), 2억원의 현금은 백석 문학상 기금으
로 내 놓는다. 그리고 '내사랑 백석'(1995년 문학동네)과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은 이름'(창작과 비평)을 출간 했다.
삶이 무어냐고 묻고 싶거든 길상사를 찾아 가면 수목 우거진 언덕 한켠에 김영한의 비석 하나가 외롭게 서 있다.
그 김여사 자야는 길상사가 문을 연지 2년만인 1999년 83세에 훌훌 서방 정토 세계로 떠난 여인이요, 백석을 위해 전
생의 삶을 보낸 멋쟁이 여인이다.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에 뿌려졌다.
김영한은 가난한 탓에 약한 신랑에게 몸 팔려간 15살에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사이에 남편이 우물에 빠져 죽는 불운
을 맞는다.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 끝에 눈물을 머금고 집을 나온 그녀는 기생의 길을 갈 수 밖에 없
었다. 가무와 궁중무를 배워 서울의 권번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할 정도로 시
와 글, 글씨, 그림에도 재능이 뛰어난 미모의 기생이었다. 흥사단에서 만난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동경 유학까지
떠나게 되지만 스승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서 함흥 감옥으로 찾아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대신 함흥 영
생여고보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영어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 1936년 운명적으로 만난다.
함흥에서는 그가 교사의 신분으로 남의 이목도 있고 했기에, 백석이 김영한의 하숙으로 와서 함께 지내다 돌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김영한이 서울로 돌아가자 백석은 아예 그녀 때문에 학교에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와서 조선일
보에 근무한다. 그리고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리고 서울과 함흥을 오가며 3년간의 동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백
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 마땅하게 생각했고 강제로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켰으나 신혼 첫날밤부터
도망치기를 여러차례, 부모에 대한 효심과 여인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백석은 괴로워 갈등하다가 이를 벗어나기 위
해 만주로 도피하자고 제의한다. 그러나 그녀는 백석의 장래를 걱정하여 함흥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백석
은 혼자 떠난다. 그때 백석을 따라 만주로 가지 않았던 실책으로 그를 비운(悲運)에 빠뜨렸다고 김영한은 늘 후회하
며 살았다. 그 당시 백석의 심경을 나타샤를 인용해 노래한 詩가 대표적 연애시인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다.
백석(본명 백기행 1912~1955)은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도쿄로 건너가 영문학을 공부하고 1930년 조선일보에 시를
투고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잘생긴 얼굴과 젠틀한 성품, 게다가 청산유수의 말솜씨로 미인들의 마음을 사로 잡
았던 댄디보이(Dand boy)였다. 그러나 백석(白石)은 많은 여인들중 자야(子夜)만을 사랑하였으며 백석의 아름다운
시(詩)는 시인과 기생의 정염(情炎)을 넘어서 깊고 넓은 그리고 애틋한 사랑의 실체를 느끼게 한다.
해방이 되자 백석은 만주에서 함흥으로 돌아왔지만 김영한은 이미 서울로 떠나버렸고 다시 그녀를 찾아 서울로
가려 할 때는 38선이 그어져 그들의 사랑은 이승에서 잇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게 된다. 분단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서글픈 사랑의 기록이다. 그 후 백석이 북한 체제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90년대 중반까지 살았
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재북작가인 탓에 그의 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불교적인 영향을 받은 큰 시인이었다.
같은 하늘 아래서 영영 만날 수 없는 사랑, 이별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함일까. 그녀는 오로지 재산 모으는데 전념을
하게 된다. 그러나 돈을 모을수록 허전함은 더하고 모진 세월마져 백석에 대한 사랑을 사그러들게 하지는 못했다.
생전에 김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은 일체의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자야는
백석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단 하나의 여인이었고, 그녀 또한 백석에 대한 그 사랑을 평생 올곧게 간직했던 여인이었다.
[女僧(여승)]
백석
여승은 함장하고 절을 한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 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山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山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 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이 詩는 기구한 삶을 살다 여승이 된 한 여인을 두고 쓴 것이나 웬지 김영한과의 사랑을
예언적으로 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http://cafe.daum.net/bok22에서 옮겨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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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삶을 살았던 생전의 법정스님
http://cafe.daum.net/decoles/에서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