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의 시로 여는 아침] 맨드라미

한국일보 | 입력 2011.06.28 09:29 |

 

 

 

                                                                                                    사진: 징소리 김성태(2011. 9.)


                           - 김명인

붉은 벽에
손톱으로 긁어놓은 저 흔적의 주인공은
이미 부재의 늪으로 이사 갔겠다
진정 아프게 문질러댄 것은 살이었으므로
허공을 피워 문 맨드라미
지금 생생하게 하루를 새기는 중!
찢긴 손톱으로 이별을 긁어대는
오늘의 사랑 뜨겁다
아침의 하늘에
날개 자국 하나 흘리지 않고
맨드라미 꽃봉오리들 지나가고 있다
푸르디푸른 판유리를 미는
시뻘건 맨살들, 하늘 벽에 파고든
핏빛 너무 선명해서
너도 쉬 지워지리, 잔상만으로 아득하리

 

느지막하게 알게 되는 아름다움도 있어요. 어릴 적 꽃밭에 핀 붉은 맨드라미를 보면 늘 이상했어요.

끝이 뭉툭 닳은 솔이나 빗자루를 공중으로 세워놓은 것처럼 생긴 꽃. 저런 못생긴 꽃을 왜 심지?

 다른 곱고 여린 꽃잎들은 하늘하늘거리며 창공을 날아다니는데.
우리를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해주는 천사의 흰 날개처럼 사랑이 다만 가볍고 환하기만 한 거라고 믿었던 시절이 지나고서야 알았어요.

그런 날개 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서 붉은 몸으로 하늘의 유리벽을 닳도록 문질러대는 사랑도 있다는 것을.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한해살이 풀인 맨드라미는 씨와 꽃을 말려 내장출혈을 막는 데 쓴대요.
핏빛으로 물들며 구불거리는 제 속을 치켜들고 버텨대다 문득 사라지는 못생긴 사랑,

 

그 아름다운 잔상만으로 이 여름의 뱃속이 아득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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