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시인선 0131] 최승자 시집
『물 위에 씌어진』
`물 위에 씌어진 3`
“꿈인지 생시인지/ 사람들이 정치를 하며 살고 있다/ 경제를 하며 살고 있다/
사회를 하며 살고 있다// 꿈인지 생시인지/ 나도 베란다에서/ 화분에 물을 주고 있다//
(내 이름은 짧은 흐느낌에 지나지 않았다/ 오 명목이여 명목이여/ 물 위에 씌어진 흐린 꿈이여)//
(죽음은 작은 터널 같은 것/ 가는 길은 나중에 환해진다)”
나는 다시 돌아왔다
-물 위에 씌어진 비본래적 실존의 허무
한국 현대 여성시의 대표 시인 최승자가 다시 돌아왔다. 11년만의 성공적인 복귀 이후, 일년 반 만에 나온 일곱 번째 시집이다. 병원을 오가며 투병 중에 씌어진 여섯 번째 시집과는 달리 이번 시집『물 위에 씌어진』에 실린 60편의 시는 전부 정신과 병동에서 씌어진 것들이다.
표독이 제거된 시는 물 위에 쓰인 시처럼 한 없이 여리고 위태롭다. 시인의 언어는 수없이 미끄러지며 결합과 분리를 반복한다. 마치 작은 터널에 들어온 것처럼 끊임없이 환유한다. 이로 인해 더욱 충만해진 의미들은 온전히 결합하며 ‘가볍게 떠오르는 그러나 깊은’ 최승자 시인만의 독특한 무의식의 언어를 보여준다.
“폐허로 오시라 나의 아씨들이여/더욱 슬퍼하기 위하여 오시라 내 詩의 아씨들이여/고독과 슬픔은 한 뿌리에서 나오는 것을” 오랜 세월 고독과 슬픔으로 쌓아 올린 시인의 폐허는 아직도 짓지 못한 내 집이자 존재 그 자체이다. 허무와 허망을 너무 일찍이 알아버린 시인이 꿈꿔왔을 초월의 세계는 神을 통해 비로소 가장 불쌍한 현존재를 볼 수 있게 해준다. 우리에게 돌아온 시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현존재를 이해하는 것과 같다. “하이데거적 본래의 향기”를 꿈꾸는 시인은 경제적인 언어로 현대 문명의 비본래적 실존을 말한다.
지금도 경기도 이천의 정신과 병원에 요양 중인 최승자 시인이, 누구보다 올곧은 시정신으로 세상을 향한 외로움의 몸짓을 처절히 노래하고 있다.
긴 말이 필요치 않다. 그녀의 육성을 아래에 인용한다.
[시인의 말]
1. 이 詩集의 詩들 전부가 정신과 병동에서 씌어진 것들이다.
2. 독자들은 갑자기 튀어나오는 神, 神할애비 등에 놀랄 수도 있겠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고, 노자와 장자를 따라가다가 맞부딪친 기이한 우연이라는 말만 더 보태자. 그렇긴 하지만 神, 神할애비 등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노자와 장자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神)마저 빠져 나갈 수가 없는 초거대물리학, 초거대집단심리학이다.
3. 쓸쓸한 날에는 장자를 읽는다. 쓸쓸한 날에는 노자보다 장자가 더 살갑다. 그러나 더 쓸쓸한 날에는 장자도 有毒하다. 세상을 두루 살펴보아도 장자의 그림 떡이 있을 뿐 그것을 능가하는 금상첨화적인 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름다움이 없으면 쓸쓸해진다) 그렇게 쓸쓸해 할 때의 나는 始源病에 걸린 나이다. 정신분열증 환자가 始源病이라는 또 다른 증상까지 겹쳐 앓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그런 날에는 술을 천천히 마신다. 始源을 그리워하면서. 눈에 보이는 꽃들이 어제 생겨난 듯하고 동시에 천만년 전부터 그렇게 환하게 피어 있는 듯한 순수와 환희를 가득 풀어줄 어떤 始源性을 그리워하면서 술을 천천히 마시는 것이다.
(하루 낮에도 천국과 지옥을 오락가락하는 게 詩人이 아니더냐)
2011년 4월
최승자
[추천글]
최승자 시인의 시를 읽으니 사람이 산다는 게 이렇도록 슬프구나 라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든다. 무언가 다 꿈결 같고 애달프다. 그래서 그지없이 아름답다. 한편, 최승자 시인은 사람의 정신이 가 닿을 수 있는 극한까지 치고 올라가, 아니 그것을 넘어서면서 예사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우주와 사람의 때묻고 얼룩지지 않은 발가숭이 모습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해서 이룩된 시의 풍경들은 어떤 것은 섬뜩하고 어떤 것은 황홀하고 또 어떤 것은 끔찍하다. 머리로 쓴 시에 길들여진 독자들에게 이 시집의 시들이 주는 충격과 감동은 클 것이다. 과연 시란 무엇일까,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신경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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