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간 지방간의 문화적 교류를 확대하는 것이 문화세기를 향한 지역의 문화예술진흥은 물론, 

지방예술의 경쟁력과 자생력이 미미한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는 동기부여를 위해

성남예총 제3대 회장으로 취임한 김성태는 동년 7월 11일 80여명의 성남예총회원을 동반하고 1박2일 일정으로

 속초예총을 방문.  성남예총과 속초예총간에 자매결연을 맺고 우의를 다졌다.

   자매결연패 교환.

 

 성남예총과 속초예총간 자매결연후 교환기념품 앞에서 김영복 속초예총 회장과 김성태 성남예총 회장-(설악산 관솔나무에 양각된 용상.

성남예총에 기증. 성남은 임홍규 초대회장의 서예휘호작품을 기증).-1992.7.11 속초관광호텔

 

 자매결연에 참가한 성남예총 회원들과- 이광용(사진).방영기(국악).백명희(국악). 정금란(무용).김월순(무용)임홍규(예총고문).이대교(미술).

허윤희(서예). 정해종(사진).손홍식(문학). 김성환(음악). 조성일(연극).이광수(연극).윤범식(도시신문 기자).황문호(성남시문화계장)등의 얼굴이 보인다.

 -대포항에서-

* 성남문화원 개황

1978년 7월, 조명천(趙明天)을 이사장, 김은집(金銀集)을 원장으로 하여 김성태(金聖泰), 윤석구(尹錫九), 김한성(金漢成),

황인태(黃寅台), 권오호(權五虎), 서상열(徐相烈), 송종건(宋種建) 등이 중심이 되어 성남문화원 설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설립 기금 모금을 위한 서화전 결과와 임대 보증금 및 재정 결산 이해 관계로 설립 준비 과정이 절박한 상황을 맞게 되었고,

추진위는 조명천을 원장으로 재 선출, 수정구 신흥동 임대 건물에서 수정구 태평동 3676번지 조명천 소유의 건물로 이전,

1980년 9월 30일부로 문공부의 설립 허가(문공 제341호)를 받고 동년 10월 20일 사단법인 등기를 필하였다.

성남문화원 개원식에는 한국문화원연합회장 노산 이은상과 이봉학 시장 등이 참석하였다.

설립 이후 임홍규(林弘圭), 강신중(姜信重), 방보영, 정금란.방영기(方榮基), 신일섭(申一燮) 등이 참여하였으며,

 1982년 1월 4일 시민회관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1984년 9월, 2대 원장에 유임된 조명천이 1985년 10월 28일 임기 중 사퇴하기까지는 성남문화원 행정기반 조성 전반의 기조를

다지면서 민속놀이 「널다리쌍용줄다리기」, 「지경다지기」 등 발굴 재현으로 경기 민속 경연대회에 참가하였고,

조선조의 여류 문인 「강정일당 사료조사」 등 향토문화의 발굴?보존사업에 힘썼다.

한편, 「시민백일장」, 「학생미술공모전」, 「충효?반공웅변대회」 등을 연례적으로 개최하여 일반 문화행사의 개시와 열악한

 환경 개선에도 노력하였다.

 원장 직무대행 중이던 임홍규가 1986년 2월 성남 예총 초대 지부장에 선출되어 사실상 직무 수행이 원활치 못하여

 1986년 7월 이사회는 권기흥(權奇興)을 영입하여 잔여 임기의 원장으로 선출하였다.

 권기흥은 문화원을 시민회관(2층)에서 수정구 신흥동의 반공회관으로 옮겼으며 3개월여 만에(1986년 10월) 다시 시민회관으로

 이전하였다.  성남문화원 제3대 회기 개시를 전후하여 권기흥이 3대 원장에 유임되는 과정에서 성남 문화원 법인 등기되어 있는

이사진을 제외시킨 총회 및 원장 선출은 불법이라는 이사진들의 이의가 합당하다고 관계 당국이 판단하게 되어 원장 승인이

지연되고 현지 조사관이 파견되는 사태가 발생하였으나 발전적으로 수습되어 1988년 9월 3대 임기를 5개월여 지난 1989년 3월

 원장이 인준되는 진통을 겪기도 하였다.

당시 영입된 임원 및 중진 인사로 조윤제(趙潤濟), 정형주(鄭亨柱), 고재혁(高濟赫), 주수광(朱秀光), 이창열(李昌烈), 홍사영 등이 참여하였다.

권기흥은 원장 재임 동안 「남한산성 축성놀이」 경기 민속 경연 출전과 <성남 문화> 회보지와 「미스 성남 선발대회」,

「장사 씨름대회」 등 일련의 행사 외에 향토유적 학술조사에 힘써, 한산이씨 묘역은 경기도 기념물 제116호, 전주이씨

서원군파묘역(瑞原君派墓域)은 경기도 기념물 제118호, 한산이씨 수내동 가옥은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84호로 지정되는데

 일조하였으며, 1991년 11월 2일부로 3대 임기 중에 사퇴하기에 이른다. 부원장 조윤제가 원장 직무대행 체제를 유지하다가

 1992년 2월 잔여 임기의 원장으로 이용상(李容相)을 선출하였다.

1993년 5월 23일 제4대 원장에 피선된 이창열은 문화원의 제정 확보와 문화인력 조직 강화를 위하여 후원회 성격의 자문위원제를

확대하면서 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를 개설하고 연구소장을 겸직하면서《성남문화연구》

(1994년 5월 20일 창간호(총 305쪽, 신국판형, 논문 7편 수록) 1, 2호(총 202쪽, 신국판형, 논문 6편 수록)를 발간하여

성남문화원의 향토연구학술 체계화 작업에 노력하였다. 이 때 전보삼, 한춘섭, 이형구, 어순영, 김창환, 백남욱 등이 참여하였다.

1974년 7월 8일의 문화원 특별법 <지방문화원진흥법> 시행이 공포되어 성남문화원은 1994년 8월 1일 위 법에 의한 특별법인

단체로서의 창립총회와 동년 9월 7일 설립 인가(문체 193호)를 필하였으나 이는 성남문화원의 새로운 재 설립이 아니고

 법령에 의한 절차일 뿐 승계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이창열이 4대 임기 중 1995년 7월 중도 사퇴하므로 1995년 8월 27일 이형하(李亨河)를 잔여 임기 원장에 보선하였다.

 1996년 10월 25일 문화원이 시민회관에서 분당구 이매동 소재의 현 농협기술센터로 이전하여 동년 11월 18일 문화원 부설 문화대학을

 개설하고 문화인구 저변 확대를 위한 문화 강좌를 실시하는 기초를 마련하였고 <성남문화연구> 제3호

(총 417쪽, 신국판형, 논문 10편 수록)을 발간하였다.

당시 허창무(許昌武), 신청(申淸), 이영성(李榮成), 소진광(蘇鎭光), 조병로(趙炳魯), 장철수(張哲秀) 등이 참여하였다.

 성남 문화원이 설립 이후 13여년 여의 태동, 과도기를 지나 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문화학교 등을 개설하여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면서 5대 회기에 접어들던 1997년 1월 10일, 오세순(吳世淳)을 5대 원장으로 선출하였다.

문화원은 동년 9월 예덕관을 부설기구로 개설하였고 <성남문화연구> 제4호(1996~ 1997년) 발간, 제 1, 2회 국제학술회의

 ‘남한산성과 삼학사’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였다. 그러나 내부 갈등이 심화되어 원장과 임원진 간의 법정소송 사태가 돌발하게

 되어 정상 운영이 되지 못하고 문화원의 오점을 남기는 등 혼선 속에서 오세순은 원장 취임 1년 만인 1977년 12월 31일부로 원장직을 사임하였다.

1998년 3월 9일, 남선우(南善祐)를 원장으로 선출하고 임원진이 새로 구성되었으며, 1997년 9월 21일 부설 문화대학이

문화관광부로부터 전문화 학교로 지정(제234호), 문화대학의 공공교육 기관의 위상이 정립되는 계기도 마련하였다.

 한편, <성남문화연구>를 계속 사업으로 발간하여 성남문화연구의 체계를 정착화 하였으며 학술회의 토론회, 논문집 발간 등 연례 사업화하였다.

그러나 5대 회기의 문화원은 내부적인 조직의 갈등이 증폭되어 2001년 이사진의 원장직무 정지가 처분 신청 등 법정소송이

 또 다시 발생하여 문화원의 위상이 침체되고 정상 운영이 혼선을 초래하여 지역사회의 지탄을 받는 시련을 거쳤으나

 발전적으로 수습되는 과정을 겪기도 하였다.

2002년 3월 8일, 제6대 원장에 남선우가 재임되었다.  2003년 8월 성남문화원이 성남문화의 집으로 이전하였으며,

 성남문화의 집과 서현문화의 집을 위탁운영하고있다.

(* 첨기-2006년부터 한춘섭(시조시인)이 원장으로 재임중이다.)

                                                                                                                  성남시사 30년사 성남문화원편 중에서

 

 성남문화원 개원 현판식- 조명천(초대원장). 이은상(한국문화원연합회장).이봉학 성남시장등.  

           

                                                                                                                              - 건배제의 하는 김성태(성남예총 회장)

                         성남시민회관(2층)에 있던 성남문화원이 분당 농촌지도소(2층)로 이전. 현판식 및 기념리셉션.

                        (오성수 시장은 문화원을 옮기고 성남예총을 시민회관2층으로 이전하도록 행정조치하였다.)

                         좌:오세순(문화원 부원장). 김성태.  이용상(전 문화원장).오성수 시장. 이영하 문화원장. 최명근.이영성.허창무등..

 

                                   

제5회 경기민속경연대회 성남대표단 '남한산성 축성놀이' 총 연출로 참가 - 1986. 9. 수원종합운동장 

 

  

 

 

 

 

                 제5회 경기도민속경연대회에 '산성축성놀이'( 총연출/ 김성태)

성남문화원(원장 권기흥) 주관으로 풍생교교생 200명등을 이끌고 참가.(수원종합운동장)

                -1986.9.

 






 경기사협 회장 이광용. 경기예총 회장 정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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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남미술인들로 구성된 '제1회 성남아트페어' 성남아트센터 광장-07.6.9.오후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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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화가 이정애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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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화가 원은경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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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화가 김종상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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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울림청소년무용단

 성남무용협회, 성남무용단등 성남무용계를 주도하는 무용인맥의 모체가 된 「성남무용학원」을

개설한 정금란이  1994.6월 타계이후 성남예총회장이던 김성태가 성남무용학원 운영을 맡으면서

 1995년 10월창단.  매년 정기<청소년 열린춤판>을 개최하고 있으며, 전국민속경연대회 개,폐막공연,

 MBC TV공연(전국방영), 성남청소년예술제. 여타 예술제등에 참가하면서 청소년 무용인재 육성에 기여하고 있다. 

 • 단장. 초대-김성태(1995.10〜1997. 5. ). 2대-조성란(1997.6〜2007.12월 현재)

                                                                                                                 - 성남시사30년사- 무용편에서

 

 

* 공연 프로그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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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립무용단

 

2007.1.5일부로 한국무용 전공자(대학무용과 재학이상 졸업자)로 단원자격을 규정하고

                                                         무용공연을 통한 무용예술발전에 기여하기 위하여 창단하고 이를 유지 발전키로 함.

                                                            고문 : 김성태

                                                            대표 겸 상임안무자 :조성란

                                                              단원(창단) :박재경. 전단비.이승주.최혜미. 차윤선. 고현주. 신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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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고 작가 유작 성남시 기증( 좌: 이대교 성남미협지부장. 유가족. 기획실장. 본인.전영국시장. 유가족).

본 기증작품은 성남시청 민원실에 게시되어 있다-당시 시장은 작가의 어린아들에게 장학금을..

 전영국 시장은1993.1.12. 취임하여 3개월 재임후 수원시장으로 전출하여 특기할 만한 예술행사의

 기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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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의 향기-삼학사(三學士) 오달제(吳達濟)
2005.12.21~12.25일 까지 성남타임주 주관으로 삼학사추모제와 삼학사중수비가 보관된 전시장, 삼학사재중수비가 건립된 중국심양의 발해대학을 다녀온바 있다.
나라사랑의 충절이 더욱 간절한 오늘, 삼학사의 역사적행적을 요약이나마 되돌아 보는것도 현대인의 애국관에 새로운 성찰의 계기가 될것이다.


오달제吳達濟
1609(광해군 1)~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의(和議)를 반대한 3학사(三學士) 중 한 사람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아버지는 윤해(允諧)이다.

1634년(인조 12)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해 전적·시강원사서를 거쳐, 이듬해 정언·지평·수찬 등을 지냈다. 1636년에 부교리로 있을 때 청이 사신을 보내 조선을 속국시하며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하자 청나라 사신을 죽이자고 주장했으며, 주화파(主和派)인 최명길(崔鳴吉)·이민구(李敏求) 등의 주장에 따라 사신을 교환하게 되자 이들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해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끝까지 척화를 주장했다. 이듬해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한 뒤, 청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요구하자 스스로 척화론자로 나서서 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 등과 함께 청나라 심양(瀋陽)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고문과 회유에 굴하지 않고 항변하다 심양성 서문(西門) 밖에서 처형당했다. 그의 절개를 기리기 위해 고향에 정문(旌門)을 세웠으며, 영의정에 추증했다. 광주(廣州) 현절사(顯節祠), 평택 포의사(褒義祠), 홍산 창렬서원(彰烈書院), 고령 운천서원(雲川書院), 영주 장암서원(壯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렬공유고 忠烈公遺稿〉가 있으며, 〈묵매도 墨梅圖〉 2점이 전한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청태종은 강화도에서 잡은 포로를 송환한 다음 그들의 진중에 억류하였던 세자, 세자빈과 봉림대군을 인질로 하고 척화론의 주모자 오달제와 윤집을 잡아 심양으로 돌아갔다. 적장 용골대(龍骨大)는 오달제의 기개와 뜻을 꺽기 위하여 처자를 거느리고 청나라에 와 살 것을 권유하며 회유도 하고 협박도 하였지만 그는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불의(不義)라 주장하면서 저들의 말을 좇으면 오랑캐가 되고 마는 것이라하여 끝내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심양성 서문밖에서 윤집, 홍익한과 함께 처형을 당하니 세상에서 이들을 삼학사(三學士)라 부르며 그 절개와 충성심을 높이 기리게 되었다. 오달제가 심양에서 처형당하자 기이하게도 그가 태어난 원삼면 학일리(學日里) 마을에는 모든 풀들이 말랐다고 하는데 이로인해 지금도 마을 이름을 고초골(枯草谷)이라 부른다.
그는 묵매화(墨梅畵)에도 뛰어났는데 어몽룡(魚夢龍), 조속(趙速), 허목(許穆)의 화풍을 따르면서도 명나라 화풍의 영향을 받아 구도가 조금은 번잡한 감을 준다고 한다. 그의 그림으로 《묵매도(墨梅圖)》2점이 전하며 이러한 구도의 묵매화는 뒷 날 조지운(趙之耘), 홍수주(洪受疇), 박동진(朴東晋), 조희룡(趙熙龍), 이공우(李公遇)등의 그림에 영향을 주었다. 삼학사의 절개와 충의는 효종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포상되었는데 좌승지·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렬(忠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광주(廣州)의 절현사(節顯祠), 평택의 포의사우(褒義祠宇), 홍산(鴻山)의 창렬서원(彰書烈院), 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렬공유고(忠烈公遺稿)》가 있고 현재 모현면 오산의 양촌마을에 자리한 그의 묘소에는 평소 착용하던 요대만 묻혀 있으며 그 앞 좌우에는 부인 의령(宜寧) 남씨와 고령(高靈) 신씨의 묘가 있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상돈



의대(衣帶)만 모신 추담(秋潭)의 유택

추담(秋潭)의 유택은 모현면 오산리 산 47번지에 있으며, 입구에는 신도비와 그 뒷쪽에는 하늘을 찌르는 전나무가 있다. 몇 백년은 된직한 이 나무는 장방형 기단에 팔작지붕을 얹은 신도비 만큼이나 의젓하고 당당해 보인다. 농가 옆 길을 오르면 소나무가 양쪽으로 시립한 산 길이 있고, 그 입구에 안내판이 서 있다. 가파른 길을 오르니 묘 3기가 삼각형의 형태로 모셔져 있는데, 앞 쪽에는 부인 2분의 묘를 나란히 모시고 뒷쪽 중앙에 추담을 모시었다. 부인들 묘 중앙에는 ‘贈貞敬夫人 宜寧南氏之墓. 贈貞敬夫人 高靈申氏之墓’라고 새긴 비석이 있고, 추담의 비석은 없다. 그러나 묘 앞 쪽 문신석은 크기가 동자상만 하여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끼가 끼인 점으로 보아 이 석물은 부인들 묘의 석물이었으나, 그 후 추담의 의대를 모시면서 그대로 세운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신도비는 화강암으로 김조순(金祖淳)이 짓고, 이상근이 글씨를 썼다. 멀리 정(鄭)포은의 산소가 바라다 보이는 추담의 묘는, 의절(義節)의 외로운 혼들이 세월을 뛰어 넘어 왕래하는 듯하다.



김성태/경기예총 수석부회장. daum.net자료참조. 요약정리






기사등록 : 2006-01-07 08:53:49
                      
충절의 향기-삼학사(三學士) 윤집(尹集)
2005.12.21~12.25일 까지 성남타임주 주관으로 삼학사추모제와 삼학사중수비가 보관된 전시장, 삼학사재중수비가 건립된 중국심양의 발해대학을 다녀온바 있다.
나라사랑의 충절이 더욱 간절한 오늘, 삼학사의 역사적행적을 요약이나마 되돌아 보는것도 현대인의 애국관에 새로운 성찰의 계기가 될것이다.


윤집[尹集]
1606(선조 39)~1637(인조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병자호란 때 청과의 화의를 반대한 3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성백(成伯), 호는 임계(林溪)·고산(高山). 아버지는 현감 형갑(衡甲)이며, 형이 남양부사 계(棨)이다. 어려서 아버지가 죽자 형과 함께 공부했다. 1631년(인조 9)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설서·이조정랑·부교리 등을 지냈다. 1636년 교리로 있을 때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선을 속국시하며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하자 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 등과 함께 사신을 죽이자고 주장했으며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던 최명길(崔鳴吉)·이민구(李敏求) 등을 탄핵했다. 그러나 이듬해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 항복을 하며 화의가 성립되고, 청나라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주장하자 오달제와 함께 소를 올려 스스로 척화론자로 나서 봉림대군(鳳林大君)·오달제·홍익한 등과 함께 청나라에 잡혀갔다. 1637년 4월 심양(瀋陽)에 도착한 뒤 고문과 회유에 굴하지 않고 항변하다 심양성 서문(西門) 밖에서 오달제와 함께 처형당했다. 광주(廣州) 절현사(節顯祠), 강화 충렬사(忠烈祠), 고령 운천서원(雲川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묘표

소재지:충남 부여군 내산면 온해리

윤집은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남원, 호는 임계(林溪),현감인 형갑(衡甲)의 아들이며, 남양부사로 근왕병을 이끌고 참전하다 전사한 윤계(尹棨)의 아우이다.
최명길(崔鳴吉)이 화의(和議)를 주장하자 "화의를 주장하는 자는 목을 베라"고 상소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다가 척화파로 지목되어 심양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선생의 부인인 안동 김씨는 당시 척화파(斥和派)의 거두인 예조판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조카딸이다.



신도비

소재지:충남 부여군 내산면 온해리
묘소 바로 아래에 1975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고 옆 마을에 지금도 후손이 살고 있다.
윤집은 청나라로 압송되어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심문하면서 척화(斥和)를 제창한 사람을 대라고 하자,"죽는 것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다. 내가 내 머리를 이고 왔으니 잘라야 할 것이면 즉시 자를 일이요 다른 말을 말라"고 하였다.
뒷날 효종 임금은 윤집의 가문에 대하여 "할아버지 윤섬,큰손자 윤계, 작은 손자 윤집은 삼절(三節)이니 참으로 귀하구나"하고 충절을 기렸다.



윤집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김성태/경기예총 수석부회장,daum.net자료참조. 요약정리

기사등록 : 2006-01-07 08:12:27
                
충절의 향기-삼학사( 三學士)홍익한(洪翼漢)
2005.12.21~12.25일 까지 성남타임주 주관으로 삼학사추모제와 삼학사중수비가 보관된 전시장, 삼학사재중수비가 건립된 중국심양의 발해대학을 다녀온바 있다.
나라사랑의 충절이 더욱 간절한 오늘, 삼학사의 역사적행적을 요약이나마 되돌아 보는것도 현대인의 애국관에 새로운 성찰의 계기가 될것이다.


洪翼漢
1586(선조 19)~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습( ). 자는 백승(伯升), 호는 화포(花浦)·운옹(雲翁). 병자호란 때 주전파(主戰派)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청나라로 끌려가서도 끝내 뜻을 굽히지 않다가 죽음을 당했다. 아버지는 진사 이성(以成)이며 어머니는 김림(金琳)의 딸이다. 큰아버지 대성(大成)에게 입양되었으며, 이정구(李廷龜)의 문인이다. 1624년(인조 2) 공주행재정시문과(公州行在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한 뒤 사서·장령 등을 역임했다. 1636년 청나라가 제호(帝號)를 쓰면서 사신을 보내 모욕적 조건을 제시하자, 상소를 올려 사신들을 즉각 처형할 것을 주장했다. 그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崔鳴吉)의 화의론(和議論)을 끝까지 반대했으며, 그의 아내와 아들·사위 등은 모두 난중에 전사하거나 자결했다. 다음해 화의가 성립되자 화친을 배척한 자들을 내놓으라는 청나라의 요구에 따라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과 함께 청나라 선양[瀋陽]으로 끌려갔다.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반청(反淸)의 자세로 버티다가 다른 2명의 학사와 함께 사형당했다. 광주 현절사(顯節祠), 강화 충렬사(忠烈祠), 홍산 창렬서원(彰烈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화포집 花浦集〉·〈북행록 北行錄〉·〈서정록 西征錄〉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묘표

서(書): 심사성(沈師聖)
연 대: 숙종15년(1689)
소재지: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

홍익한(1586~1637)의 본관은 남양,호는 화포(花浦), 진사 이성(以成)의 아들이고 이정구(李廷龜)의 문인이다. 삼학사의 한사람으로 청나라와의 화의를 배척하고 척화를 주장하여 윤집,오달제와 함께 체포되어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갔다. 언관(言官)으로서 대의(大義)를 밝히며 의연한 뜻을 끝까지 지키다 처형당하였다.
묘비 앞 들녘에는 미공군부대가 들어서 있어 예나 지금이나 점령군의 틈에서 대의와 굴욕이 교차하는 듯하여 감회가 비통하다. 비문은 외증손 심사성이 썼다.

묘갈
贈領議政諡忠正洪公墓碑銘
(증영의정시충정홍공묘비명)

전(篆):민진원(閔鎭遠)
찬(撰):송시열(宋時烈)
서(書):이의현(李宜顯)
소재지: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
묘소 앞 포의각(褒義閣) 안에 있는 비석으로 비문을 찬술한 송시열은 그의 저서 송자대전(宋子大全)의 삼학사전(三學士傳)에서 말하길,홍익한이 처형되자 함께 끌려간 소현세자가 명을 내려 비단에다 초혼(招魂)해서 본국으로 보내었는데, 아들 또한 청나라 군사에게 처형당하여 후사가 없으므로 양자인 응원(應元)이 선생의 옷과 신을 매장하고 부인 허씨를 합장하였다고 한다


수양산(首陽山) 나린 물이 이제(夷齊0의 원루(寃淚0이 되어
주야불식(晝夜不息)하고 여울여울 우는 뜻은
지금(只今)에 위국충신(爲國忠臣)을 못내 �어 하노라 -홍익한


김성태st3845@hanmail.net/경기예총수석부회장, daum.net자료참조 요약정리

      

 삼학사비(三學士碑)의 고찰(考察)-삼한산두(三韓山斗)의 역사현장

2005년12월 21일부터 25일까지 성남타임즈(발행인 고재혁)주관으로 중국심양의 발해대학에서 삼학사 추모제에 참석하였다. 이에 삼학사비에 대하여 정리하여 삼학사의 역사적 재 조명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삼한산두(三韓山斗)!라는 글귀는 삼학사 비두에 청태종이 새긴 말이다.
조선의 태산과 북두.
"태산같이 높고 북두칠성같이 빛나는 분"


삼학사비(三學士碑)

<동아일보> 1933년 5월 13일자에 수록된 "삼학사 비석" 관련보도.

인조 당년(仁祖 當年)의 삼학사(三學士)
봉천(奉天)에서 비석(碑石) 발견
청태종(淸太宗)에 굴복(屈服)않고 장열(壯烈)한 최후(最後)
충혼의백(忠魂毅魄)의 옛자취

지난 5일 봉천(奉天) 십간방 일중어강습소 소장 황육덕(黃肉德, 황윤덕의 오기)씨는 북시장(北市場) 보선사(保○寺) 문전에서 삼한산두(三韓山斗)라고 새긴 중동 부러진 비석 한 개를 파내었다. 이 비석은 용을 조각한 훌륭한 비석이나 바람과 비에 닳고 낡았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땅속에 묻혔던 관계로 그 조각면이 확실히 남아 있지 아니 하였다. 그러나 삼한산두의 넉자 만은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어 그 당시 사적을 역력히 말하고 있었다 한다. 이 비석인즉 인조(仁祖)의 충신열사 삼학사(三學士)의 유적이다.

지금으로부터 298년전 인조시에 청태종(淸太宗)이 조선과 친선을 맺고자 누차 조선에 사신을 보내었으나 명조(明朝)와의 관계로 이것을 듣지 아니하여 마침 태종은 대병을 거느리고 병자년(丙子年) 섯달에 왕성를 범하였다.

이때 인조께서는 신하와 종친을 데리시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피하시니 때의 형세는 그야말로 사직(社稷)의 흥망을 재촉하는 것 같았다. 형세가 이에 미치매 조정에는 화전양론이 대치되었는데 당시 김청음(金淸陰) 정동계(鄭桐溪) 등 중신과 홍익한(洪翼漢)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 등 삼학사가 화친은 항복을 말하는 것이라 하여 끝까지 반대하였다.

그러나 세 이미 불리하여 화친할 도리 이외에는 좌이대사하는 수밖에 없었으니 청병에게 당하는 백성의 욕은 나날이 심하여 갔으므로 하는 수 없이 청조와과 화친을 맺었다. 이 굴욕의 화친은 왕자 두 분과 화친을 반대하던 삼학사를 배도(陪都)(지금 봉천)로 보내고 말았으니 왕자 두 분은 현재 봉천교섭처(奉天交涉處)인 질관(質館)에 계시게 하고 삼학사는 옥에 넣었다. 그리고 삼학사를 백방으로 달래기도 하고 갖은 악형 하여 항복을 하라고 하였으나 결국 듣지 아니하여 참하여 버렸다.

이 삼학사의 장렬한 충절은 그 후 청조유사(淸朝遺事), 동화록(東華錄), 청사(淸史), 청사통속연의(淸史通俗演義), 배도잡기(陪都雜記) 등에 명기되어 역사로, 소설로, 연극으로 삼학사의 사적은 전하여왔다. 뿐 아니라 당시 청조에서는 삼학사의 절개를 경앙하고 또 자국민의 절의를 장려하기 위하여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은 절개라고 봉천 성서소사(城西小寺) 부근에 묘(廟)를 짓고 전기 삼한산두라고 새긴 석비를 세워 춘추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 삼학사의 비가 청조가 망하자 돌아보는 사람없이 20여년 동안을 땅속에 묻히어 있다가 우연히 조선인의 손으로 발굴되었는데 황씨는 봉천의 유지들과 의론하고 이 비석을 목하 황씨의 강습소로 옮기어 두었는데 앞으로 북시장 공원에 삼학사비를 다시 세워 오래, 오래 지사의 혼을 기념할 터이라는데, 현재 봉천총영사관 부영사 오두환(吳斗煥)씨와 관동군사령부의 윤상필(尹相弼) 대위가 이 삼학사 오달제, 윤집의 후손이라고 한다. 위 동아일보 보도외에도 동년5월12일자의 <매일십보>의 같은기사, 1934년6월3일 <조선중앙일보>에도 삼학사유적보존회 창립과 관련기사가 보도 되었다.


삼학사중수비(三學士重修碑)

1935년 병자호란 300돌을 기념하여 당시 항일운동의 거점도시였던 봉천(지금의 심양)에서 황인덕.김구경등이 중심되고 삼학사유적보존회와 조선동포 120여명이 모금하여
심양시 춘일공원에 삼학사중수비를 건립하고 삼학사의 절개와 민족혼을 지켜 조국독립을 염원하는 추모제를 올렸다. 이중에는 일본인도 있었다니 그들의 삼학사에 대한 역사관을 엿볼 수 있다.

<중수삼학사비기(重修三學士碑記)>

조선은 단군이 나라의 기틀을 세웠고 기자가 강역을 열었다. 풍속이 충효를 숭상하고 선비들은 인의에 도타우니, 예로부터 예의의 나라로 일컬어져 왔다. 300년전인 인조 14년 병자년 겨울 청태종이 조선을 침략했다. 남한산성의 형세가 위태롭자 조정에서는 강화를 청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이때 대간 홍익한. 교리 윤집. 수찬 오달제는 대의를 부르짖으며 화의를 배척하였다. 화의가 이루어자 삼학사는 척화의 수괴로 지목되어 심양에 잡혀갔다.

청 조정에서는 이들을 귀순시키고자 하여, 온갖 영예와 이익으로 회유하는 한편 엄혹한 형벌로 협박하였다. 허지만 세분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다음해 3월에 죽었다. 그 높은 절개와 큰 의리는 일월과 빛을 다투고 만고에 썩지 않을 것이다. 이에 나라에서는 남한산성에 현절사, 부여에는 창절사를 세웠고, 경상도 영천에는 장엄서원을 개창하여 그 정신을 기렸으니 향사가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다. 청조에서도 그 곧은 의리를 포장하여 심양성 서문밖에 사당을 건립하고 비석을 세워 그 위에 삼한산두(三韓山斗)를 새겼다. 삼한이란 조선을 가리키고, 산두란 그 절의가 태산북두처럼 빛난다는 뜻이다.

사당과 비석을 세운 전말이 청나라 사람이 쓴 일사(軼史, 일종의 야사)에 실려 있다.계유년 겨울 나는 심양에 머물면서 그 유적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하지만 세월이 오래되어 사당과 비석은 모두 사라졌다. 교외에서 옛일을 조상하는데 감개한 탄식을 이길수 없었다. 마을의고로에게 물어보니, 소서문 밖 세분이 순절한 곳에 작은 절이 있었는데, 조선의 세분을 모신 사당으로 전해진다고 하였다. 지금의 북시장(北市場) 보령사 (保靈寺)근처이다. 절문 앞 눈구덩이 속에서 비액(碑額)하나를 찾았는데, 글자를 새긴 흔적이 있었다. 흙을 씻어내고 보니 '삼한산두' 넉자가 찬연하니, 일사의 내용과 서로 딱 맞았다. 절의 주인과 상의하여 내가 사는 집으로 옮겨두고, 두루 비신을 찾았지만 찾지 못하여 오래도록 아쉬운 마음을 금치 못하였다. 이때 심양에 사는 여러 현자들이 그 사연을 영원히 하고자 하여' 삼학사유적보존'를 발기하였다. 각자 나누어 성금을 모아 새로 비신과 귀부를 조성하고 여기에 비액을 얹어 다시 세웠다. 이로써 충절의 기상은 위로 해와 별을 꿰뚫으니, 세상이 변하여 때로 숨겨지기도 하지만 결국 영원히 묻히게 하지 않으며, 사람들의 말없는 느낌은 귀신의 기호와 상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영원토록 보존되어 흙더미 속에 묻히지 않게 되기를 후세의 군자들에게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짓는다.

인조 병자년으로부터 300년이 지난 을해년 봄 3월에
창원 황윤덕이 삼가 짓고 경주 김구경이 삼가 쓰다.
(번역 이승수)

그러나 삼학사중수비를 세운 조선동포들의 염원은 1966년 중국의 문화혁명 소용돌이를 비켜가지 못하였다. 홍위병들이 이비를 강변에 내다 버렸고, 이후 어느 중국인의 집 주춧돌에 놓인것을 당시 랴오닝대 교수이자 중국과학자협회 부이사장인 천문갑(현 발해대학장)이 인민페 5천위안에 구입하여 발해대학에 갖다 놓았다고 한다.

역사와 현실은 항상 이데올로기의 관계선상에 있는 것인지, 삼학사의 유일한 현장 유물인 중수비는 어떤 연유인지 훼손되고 방치된체 한. 중 국제교류의 개화 시대에 이르기 까지 질곡의 역사를 지켜왔다.

삼학사재중수비(三學士再重修碑)

1997년 허창무. 신청등이 성남문화원 부원장으로 남한산성의 문화권역을 학술적으로 재 조명하고 '삼학사 모시요!'등 사업을 개시하였다. 한편,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사람들(남사모)의 모임이 결성되면서 본격적인 삼학사 정신선양의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경기도가 남한산성 행궁을 복원하고 산성복원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삼학사에 대한 성남 광주 문화권역의 연대가 이루어 진것도 역사되찾기의 맥락에서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광주문화원이 주관된 현절사의 삼학사 추모제가 언론의 관심으로 등장되었다.

2004년 허창무. 신청. 고재혁.서학선등이 주도하여 요녕발해대학교후원회(회장 허창무)를 결성하고 동년 12월 발해대학에서 첫번째 삼학사추모제를 고재혁 주도로 올렸다.

이를 계기로 방치되고 훼손된 삼학사중수비의 복원이 활발하게 논의되던중 계룡건설 장학재단(이사장 이인구)이 후원하여 2005년 7월 30일 드디어 요녕발해대학 교정에 삼학사 재중수비와 학사정을 세웠고 방치된 중수비도 발해대학내 보관 전시하게 되었다


삼학사재중수비는 중수비와 같이 용두 2m. 폭83cm.두께 26cm. 높이 390cm로 거북형상의 비대로 비두와 함께 학자들의 고증에 따랐다고 한다. 한편, 계룡건설장학재단은 요녕발해대학에 세운 똑같은 모조비를 동년 8월 31일 천안 독립기념관에도 건립하여 삼학사의 충정을 후대에 귀감토록 하였다.

후일의 사가들은 병자호란 당시 항복문서를 쓴 사람도, 이를 찢은 사람도 "열지자 충, 결지자 충"의 양시론(兩是論)을 펴고 있어 사관의 객관적 접근이 아쉬운 현대사회의 기류이다. 




삼학사추모제의 참가는 심양시의'한국주간'에 성남예술단장으로 수 차례 방문한 민간차원의 문화사절 사명에 또다른 한국인의 기상을 의식한데서 느낌이 깊다.

삼학사의 항쟁이 베어있는 역사의 현장인 남한산성 문화권에 하루빨리 삼한산두(三韓山斗)의 삼학사비가 세워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김성태 st3845@hanmail.net/경기예총 수석부회장

기사등록 : 2006-01-04 14:29:18

 

* (관련자료)

* 삼학사 추모제 회고 (2005년)

삼한산두(三韓山斗)의 삼학사(三學士) 재 중수비 - 2005. 12. 22. 중국심양 발해대학 교정에서 본인 촬영 

(조선의 태산과 북두-태산같이 높고 북두칠성같이 빛나는 분)

 

삼학사(윤집. 오달제. 홍익한) 재 중수비가 세워진 중국심양 발해대학 교정에서 -2005. 12. 22. 

'삼학사 추모제'를 위해 2005. 12. 21.~12. 25. 중국심양 발해대학 방문 중)

 

삼학사 추모제에 헌화하는 김성태(성남타임즈 편집인) -2005. 12. 22.

 

삼학사 추모제 준비과정을 지켜보는 참석자들.(좌에서5번째가 발해대학 문갑 학장) -2005. 12. 22. 중국 심양 발해대학 강당에서 

 

훼손되어 방치된 삼학사비를 보관하고 있는 발해대학 전시관에서 -2005. 12. 22.

좌 : 염창순. 고재혁. 김성태. 류수남. 신청.

 

 

 

 

 수양산에서 내린 물이 이제의 피눈물 되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여흘여흘 우는 뜻은,
이대도록 나라 위한 충절을 못내 슬퍼함이라.
주욕신사니 내 먼저 죽어져서,
혼백이 되어 고국에 돌아감이 나의 원이러니,
어허! 오랑캐의 티끌이 해를 가림을 차마 어이 보리요

                                                                     - 홍익한-

성남을 방문한 발해대학 천문갑 학장과 -2005. 12. 1. 분당에서

좌: 류수남. 허창무. 조윤제. 고재혁. 이혜심. 천문갑. 김성태.

 

삼학사 추모제 참석일행이 심양공항에서 심양조선족노년예술단원들의 환영 꽃다발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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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학사비 관련>

(성남뉴스넷 맹교수 사랑방 이야기 중 "독립기념관 가는 길" - 퍼옴

본디 삼학사비는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의 충절을 기리고 그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청태종(淸太宗)이 제단을 모으고 세운 비였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 파괴되고 민멸하였기 때문에 ‘삼한북두’라는 네 글자만 있는 비액(碑額)을 가지고 1935(丙子)년 3월에 요녕성 심양에 거주하는 한국동포들이 ‘삼학사유적보존회’를 결성하여 성금을 모아 비신(碑身)과 귀부(龜趺)를 갖추어 심양에 다시 세운 것이었다.


그 후 중국의 문화혁명기(1966∼1976)에 파손되었다가 훈허(渾河)에서 어느 농부가 비신만을 보관하고 있는 것을 천문갑(千文甲)교수가 요녕대학에 임시보관하다가 발해대학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는 터에 한국 성남시의 지원을 받아 허창무교수(발해대학후원회장) 전보삼교수 고재혁씨 김성태씨 신청씨 서학선씨 등이 협력하고, 2005년 계룡건설(계룡장학재단) 이인구(李麟求) 명예회장의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받아 원형대로 2기를 모조하여 하나는 발해대학 구내에 세우고 하나는 독립기념관 부지에 세운 것이었다. 따라서 이 비들은 재중수비(再重修碑)에 속하는 셈이다.


이인구회장은 2006년 발해대학 구내에 학사정(學士亭)을 준공하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으며, 현재 독립기념관 삼학사비 옆에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는 광개토대왕비도 2004년에 그가 세워 놓은 것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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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문학 발해대학 학장 사망이후 폐교된 발해대학 교정에 있는 삼학사 비(돌보는 이 없어 잡초만 무성)-인터넷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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