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절의 향기-삼학사(三學士) 오달제(吳達濟)
2005.12.21~12.25일 까지 성남타임주 주관으로 삼학사추모제와 삼학사중수비가 보관된 전시장, 삼학사재중수비가 건립된 중국심양의 발해대학을 다녀온바 있다.
나라사랑의 충절이 더욱 간절한 오늘, 삼학사의 역사적행적을 요약이나마 되돌아 보는것도 현대인의 애국관에 새로운 성찰의 계기가 될것이다.


오달제吳達濟
1609(광해군 1)~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의(和議)를 반대한 3학사(三學士) 중 한 사람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아버지는 윤해(允諧)이다.

1634년(인조 12)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해 전적·시강원사서를 거쳐, 이듬해 정언·지평·수찬 등을 지냈다. 1636년에 부교리로 있을 때 청이 사신을 보내 조선을 속국시하며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하자 청나라 사신을 죽이자고 주장했으며, 주화파(主和派)인 최명길(崔鳴吉)·이민구(李敏求) 등의 주장에 따라 사신을 교환하게 되자 이들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해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끝까지 척화를 주장했다. 이듬해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한 뒤, 청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요구하자 스스로 척화론자로 나서서 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 등과 함께 청나라 심양(瀋陽)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고문과 회유에 굴하지 않고 항변하다 심양성 서문(西門) 밖에서 처형당했다. 그의 절개를 기리기 위해 고향에 정문(旌門)을 세웠으며, 영의정에 추증했다. 광주(廣州) 현절사(顯節祠), 평택 포의사(褒義祠), 홍산 창렬서원(彰烈書院), 고령 운천서원(雲川書院), 영주 장암서원(壯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렬공유고 忠烈公遺稿〉가 있으며, 〈묵매도 墨梅圖〉 2점이 전한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청태종은 강화도에서 잡은 포로를 송환한 다음 그들의 진중에 억류하였던 세자, 세자빈과 봉림대군을 인질로 하고 척화론의 주모자 오달제와 윤집을 잡아 심양으로 돌아갔다. 적장 용골대(龍骨大)는 오달제의 기개와 뜻을 꺽기 위하여 처자를 거느리고 청나라에 와 살 것을 권유하며 회유도 하고 협박도 하였지만 그는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불의(不義)라 주장하면서 저들의 말을 좇으면 오랑캐가 되고 마는 것이라하여 끝내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심양성 서문밖에서 윤집, 홍익한과 함께 처형을 당하니 세상에서 이들을 삼학사(三學士)라 부르며 그 절개와 충성심을 높이 기리게 되었다. 오달제가 심양에서 처형당하자 기이하게도 그가 태어난 원삼면 학일리(學日里) 마을에는 모든 풀들이 말랐다고 하는데 이로인해 지금도 마을 이름을 고초골(枯草谷)이라 부른다.
그는 묵매화(墨梅畵)에도 뛰어났는데 어몽룡(魚夢龍), 조속(趙速), 허목(許穆)의 화풍을 따르면서도 명나라 화풍의 영향을 받아 구도가 조금은 번잡한 감을 준다고 한다. 그의 그림으로 《묵매도(墨梅圖)》2점이 전하며 이러한 구도의 묵매화는 뒷 날 조지운(趙之耘), 홍수주(洪受疇), 박동진(朴東晋), 조희룡(趙熙龍), 이공우(李公遇)등의 그림에 영향을 주었다. 삼학사의 절개와 충의는 효종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포상되었는데 좌승지·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렬(忠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광주(廣州)의 절현사(節顯祠), 평택의 포의사우(褒義祠宇), 홍산(鴻山)의 창렬서원(彰書烈院), 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렬공유고(忠烈公遺稿)》가 있고 현재 모현면 오산의 양촌마을에 자리한 그의 묘소에는 평소 착용하던 요대만 묻혀 있으며 그 앞 좌우에는 부인 의령(宜寧) 남씨와 고령(高靈) 신씨의 묘가 있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상돈



의대(衣帶)만 모신 추담(秋潭)의 유택

추담(秋潭)의 유택은 모현면 오산리 산 47번지에 있으며, 입구에는 신도비와 그 뒷쪽에는 하늘을 찌르는 전나무가 있다. 몇 백년은 된직한 이 나무는 장방형 기단에 팔작지붕을 얹은 신도비 만큼이나 의젓하고 당당해 보인다. 농가 옆 길을 오르면 소나무가 양쪽으로 시립한 산 길이 있고, 그 입구에 안내판이 서 있다. 가파른 길을 오르니 묘 3기가 삼각형의 형태로 모셔져 있는데, 앞 쪽에는 부인 2분의 묘를 나란히 모시고 뒷쪽 중앙에 추담을 모시었다. 부인들 묘 중앙에는 ‘贈貞敬夫人 宜寧南氏之墓. 贈貞敬夫人 高靈申氏之墓’라고 새긴 비석이 있고, 추담의 비석은 없다. 그러나 묘 앞 쪽 문신석은 크기가 동자상만 하여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끼가 끼인 점으로 보아 이 석물은 부인들 묘의 석물이었으나, 그 후 추담의 의대를 모시면서 그대로 세운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신도비는 화강암으로 김조순(金祖淳)이 짓고, 이상근이 글씨를 썼다. 멀리 정(鄭)포은의 산소가 바라다 보이는 추담의 묘는, 의절(義節)의 외로운 혼들이 세월을 뛰어 넘어 왕래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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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등록 : 2006-01-07 08:53:49
                      
충절의 향기-삼학사(三學士) 윤집(尹集)
2005.12.21~12.25일 까지 성남타임주 주관으로 삼학사추모제와 삼학사중수비가 보관된 전시장, 삼학사재중수비가 건립된 중국심양의 발해대학을 다녀온바 있다.
나라사랑의 충절이 더욱 간절한 오늘, 삼학사의 역사적행적을 요약이나마 되돌아 보는것도 현대인의 애국관에 새로운 성찰의 계기가 될것이다.


윤집[尹集]
1606(선조 39)~1637(인조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병자호란 때 청과의 화의를 반대한 3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성백(成伯), 호는 임계(林溪)·고산(高山). 아버지는 현감 형갑(衡甲)이며, 형이 남양부사 계(棨)이다. 어려서 아버지가 죽자 형과 함께 공부했다. 1631년(인조 9)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설서·이조정랑·부교리 등을 지냈다. 1636년 교리로 있을 때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선을 속국시하며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하자 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 등과 함께 사신을 죽이자고 주장했으며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던 최명길(崔鳴吉)·이민구(李敏求) 등을 탄핵했다. 그러나 이듬해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 항복을 하며 화의가 성립되고, 청나라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주장하자 오달제와 함께 소를 올려 스스로 척화론자로 나서 봉림대군(鳳林大君)·오달제·홍익한 등과 함께 청나라에 잡혀갔다. 1637년 4월 심양(瀋陽)에 도착한 뒤 고문과 회유에 굴하지 않고 항변하다 심양성 서문(西門) 밖에서 오달제와 함께 처형당했다. 광주(廣州) 절현사(節顯祠), 강화 충렬사(忠烈祠), 고령 운천서원(雲川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묘표

소재지:충남 부여군 내산면 온해리

윤집은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남원, 호는 임계(林溪),현감인 형갑(衡甲)의 아들이며, 남양부사로 근왕병을 이끌고 참전하다 전사한 윤계(尹棨)의 아우이다.
최명길(崔鳴吉)이 화의(和議)를 주장하자 "화의를 주장하는 자는 목을 베라"고 상소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다가 척화파로 지목되어 심양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선생의 부인인 안동 김씨는 당시 척화파(斥和派)의 거두인 예조판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조카딸이다.



신도비

소재지:충남 부여군 내산면 온해리
묘소 바로 아래에 1975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고 옆 마을에 지금도 후손이 살고 있다.
윤집은 청나라로 압송되어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심문하면서 척화(斥和)를 제창한 사람을 대라고 하자,"죽는 것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다. 내가 내 머리를 이고 왔으니 잘라야 할 것이면 즉시 자를 일이요 다른 말을 말라"고 하였다.
뒷날 효종 임금은 윤집의 가문에 대하여 "할아버지 윤섬,큰손자 윤계, 작은 손자 윤집은 삼절(三節)이니 참으로 귀하구나"하고 충절을 기렸다.



윤집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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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등록 : 2006-01-07 08:12:27
                
충절의 향기-삼학사( 三學士)홍익한(洪翼漢)
2005.12.21~12.25일 까지 성남타임주 주관으로 삼학사추모제와 삼학사중수비가 보관된 전시장, 삼학사재중수비가 건립된 중국심양의 발해대학을 다녀온바 있다.
나라사랑의 충절이 더욱 간절한 오늘, 삼학사의 역사적행적을 요약이나마 되돌아 보는것도 현대인의 애국관에 새로운 성찰의 계기가 될것이다.


洪翼漢
1586(선조 19)~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습( ). 자는 백승(伯升), 호는 화포(花浦)·운옹(雲翁). 병자호란 때 주전파(主戰派)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청나라로 끌려가서도 끝내 뜻을 굽히지 않다가 죽음을 당했다. 아버지는 진사 이성(以成)이며 어머니는 김림(金琳)의 딸이다. 큰아버지 대성(大成)에게 입양되었으며, 이정구(李廷龜)의 문인이다. 1624년(인조 2) 공주행재정시문과(公州行在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한 뒤 사서·장령 등을 역임했다. 1636년 청나라가 제호(帝號)를 쓰면서 사신을 보내 모욕적 조건을 제시하자, 상소를 올려 사신들을 즉각 처형할 것을 주장했다. 그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崔鳴吉)의 화의론(和議論)을 끝까지 반대했으며, 그의 아내와 아들·사위 등은 모두 난중에 전사하거나 자결했다. 다음해 화의가 성립되자 화친을 배척한 자들을 내놓으라는 청나라의 요구에 따라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과 함께 청나라 선양[瀋陽]으로 끌려갔다.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반청(反淸)의 자세로 버티다가 다른 2명의 학사와 함께 사형당했다. 광주 현절사(顯節祠), 강화 충렬사(忠烈祠), 홍산 창렬서원(彰烈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화포집 花浦集〉·〈북행록 北行錄〉·〈서정록 西征錄〉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묘표

서(書): 심사성(沈師聖)
연 대: 숙종15년(1689)
소재지: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

홍익한(1586~1637)의 본관은 남양,호는 화포(花浦), 진사 이성(以成)의 아들이고 이정구(李廷龜)의 문인이다. 삼학사의 한사람으로 청나라와의 화의를 배척하고 척화를 주장하여 윤집,오달제와 함께 체포되어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갔다. 언관(言官)으로서 대의(大義)를 밝히며 의연한 뜻을 끝까지 지키다 처형당하였다.
묘비 앞 들녘에는 미공군부대가 들어서 있어 예나 지금이나 점령군의 틈에서 대의와 굴욕이 교차하는 듯하여 감회가 비통하다. 비문은 외증손 심사성이 썼다.

묘갈
贈領議政諡忠正洪公墓碑銘
(증영의정시충정홍공묘비명)

전(篆):민진원(閔鎭遠)
찬(撰):송시열(宋時烈)
서(書):이의현(李宜顯)
소재지: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
묘소 앞 포의각(褒義閣) 안에 있는 비석으로 비문을 찬술한 송시열은 그의 저서 송자대전(宋子大全)의 삼학사전(三學士傳)에서 말하길,홍익한이 처형되자 함께 끌려간 소현세자가 명을 내려 비단에다 초혼(招魂)해서 본국으로 보내었는데, 아들 또한 청나라 군사에게 처형당하여 후사가 없으므로 양자인 응원(應元)이 선생의 옷과 신을 매장하고 부인 허씨를 합장하였다고 한다


수양산(首陽山) 나린 물이 이제(夷齊0의 원루(寃淚0이 되어
주야불식(晝夜不息)하고 여울여울 우는 뜻은
지금(只今)에 위국충신(爲國忠臣)을 못내 �어 하노라 -홍익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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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학사비(三學士碑)의 고찰(考察)-삼한산두(三韓山斗)의 역사현장

2005년12월 21일부터 25일까지 성남타임즈(발행인 고재혁)주관으로 중국심양의 발해대학에서 삼학사 추모제에 참석하였다. 이에 삼학사비에 대하여 정리하여 삼학사의 역사적 재 조명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삼한산두(三韓山斗)!라는 글귀는 삼학사 비두에 청태종이 새긴 말이다.
조선의 태산과 북두.
"태산같이 높고 북두칠성같이 빛나는 분"


삼학사비(三學士碑)

<동아일보> 1933년 5월 13일자에 수록된 "삼학사 비석" 관련보도.

인조 당년(仁祖 當年)의 삼학사(三學士)
봉천(奉天)에서 비석(碑石) 발견
청태종(淸太宗)에 굴복(屈服)않고 장열(壯烈)한 최후(最後)
충혼의백(忠魂毅魄)의 옛자취

지난 5일 봉천(奉天) 십간방 일중어강습소 소장 황육덕(黃肉德, 황윤덕의 오기)씨는 북시장(北市場) 보선사(保○寺) 문전에서 삼한산두(三韓山斗)라고 새긴 중동 부러진 비석 한 개를 파내었다. 이 비석은 용을 조각한 훌륭한 비석이나 바람과 비에 닳고 낡았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땅속에 묻혔던 관계로 그 조각면이 확실히 남아 있지 아니 하였다. 그러나 삼한산두의 넉자 만은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어 그 당시 사적을 역력히 말하고 있었다 한다. 이 비석인즉 인조(仁祖)의 충신열사 삼학사(三學士)의 유적이다.

지금으로부터 298년전 인조시에 청태종(淸太宗)이 조선과 친선을 맺고자 누차 조선에 사신을 보내었으나 명조(明朝)와의 관계로 이것을 듣지 아니하여 마침 태종은 대병을 거느리고 병자년(丙子年) 섯달에 왕성를 범하였다.

이때 인조께서는 신하와 종친을 데리시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피하시니 때의 형세는 그야말로 사직(社稷)의 흥망을 재촉하는 것 같았다. 형세가 이에 미치매 조정에는 화전양론이 대치되었는데 당시 김청음(金淸陰) 정동계(鄭桐溪) 등 중신과 홍익한(洪翼漢)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 등 삼학사가 화친은 항복을 말하는 것이라 하여 끝까지 반대하였다.

그러나 세 이미 불리하여 화친할 도리 이외에는 좌이대사하는 수밖에 없었으니 청병에게 당하는 백성의 욕은 나날이 심하여 갔으므로 하는 수 없이 청조와과 화친을 맺었다. 이 굴욕의 화친은 왕자 두 분과 화친을 반대하던 삼학사를 배도(陪都)(지금 봉천)로 보내고 말았으니 왕자 두 분은 현재 봉천교섭처(奉天交涉處)인 질관(質館)에 계시게 하고 삼학사는 옥에 넣었다. 그리고 삼학사를 백방으로 달래기도 하고 갖은 악형 하여 항복을 하라고 하였으나 결국 듣지 아니하여 참하여 버렸다.

이 삼학사의 장렬한 충절은 그 후 청조유사(淸朝遺事), 동화록(東華錄), 청사(淸史), 청사통속연의(淸史通俗演義), 배도잡기(陪都雜記) 등에 명기되어 역사로, 소설로, 연극으로 삼학사의 사적은 전하여왔다. 뿐 아니라 당시 청조에서는 삼학사의 절개를 경앙하고 또 자국민의 절의를 장려하기 위하여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은 절개라고 봉천 성서소사(城西小寺) 부근에 묘(廟)를 짓고 전기 삼한산두라고 새긴 석비를 세워 춘추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 삼학사의 비가 청조가 망하자 돌아보는 사람없이 20여년 동안을 땅속에 묻히어 있다가 우연히 조선인의 손으로 발굴되었는데 황씨는 봉천의 유지들과 의론하고 이 비석을 목하 황씨의 강습소로 옮기어 두었는데 앞으로 북시장 공원에 삼학사비를 다시 세워 오래, 오래 지사의 혼을 기념할 터이라는데, 현재 봉천총영사관 부영사 오두환(吳斗煥)씨와 관동군사령부의 윤상필(尹相弼) 대위가 이 삼학사 오달제, 윤집의 후손이라고 한다. 위 동아일보 보도외에도 동년5월12일자의 <매일십보>의 같은기사, 1934년6월3일 <조선중앙일보>에도 삼학사유적보존회 창립과 관련기사가 보도 되었다.


삼학사중수비(三學士重修碑)

1935년 병자호란 300돌을 기념하여 당시 항일운동의 거점도시였던 봉천(지금의 심양)에서 황인덕.김구경등이 중심되고 삼학사유적보존회와 조선동포 120여명이 모금하여
심양시 춘일공원에 삼학사중수비를 건립하고 삼학사의 절개와 민족혼을 지켜 조국독립을 염원하는 추모제를 올렸다. 이중에는 일본인도 있었다니 그들의 삼학사에 대한 역사관을 엿볼 수 있다.

<중수삼학사비기(重修三學士碑記)>

조선은 단군이 나라의 기틀을 세웠고 기자가 강역을 열었다. 풍속이 충효를 숭상하고 선비들은 인의에 도타우니, 예로부터 예의의 나라로 일컬어져 왔다. 300년전인 인조 14년 병자년 겨울 청태종이 조선을 침략했다. 남한산성의 형세가 위태롭자 조정에서는 강화를 청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이때 대간 홍익한. 교리 윤집. 수찬 오달제는 대의를 부르짖으며 화의를 배척하였다. 화의가 이루어자 삼학사는 척화의 수괴로 지목되어 심양에 잡혀갔다.

청 조정에서는 이들을 귀순시키고자 하여, 온갖 영예와 이익으로 회유하는 한편 엄혹한 형벌로 협박하였다. 허지만 세분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다음해 3월에 죽었다. 그 높은 절개와 큰 의리는 일월과 빛을 다투고 만고에 썩지 않을 것이다. 이에 나라에서는 남한산성에 현절사, 부여에는 창절사를 세웠고, 경상도 영천에는 장엄서원을 개창하여 그 정신을 기렸으니 향사가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다. 청조에서도 그 곧은 의리를 포장하여 심양성 서문밖에 사당을 건립하고 비석을 세워 그 위에 삼한산두(三韓山斗)를 새겼다. 삼한이란 조선을 가리키고, 산두란 그 절의가 태산북두처럼 빛난다는 뜻이다.

사당과 비석을 세운 전말이 청나라 사람이 쓴 일사(軼史, 일종의 야사)에 실려 있다.계유년 겨울 나는 심양에 머물면서 그 유적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하지만 세월이 오래되어 사당과 비석은 모두 사라졌다. 교외에서 옛일을 조상하는데 감개한 탄식을 이길수 없었다. 마을의고로에게 물어보니, 소서문 밖 세분이 순절한 곳에 작은 절이 있었는데, 조선의 세분을 모신 사당으로 전해진다고 하였다. 지금의 북시장(北市場) 보령사 (保靈寺)근처이다. 절문 앞 눈구덩이 속에서 비액(碑額)하나를 찾았는데, 글자를 새긴 흔적이 있었다. 흙을 씻어내고 보니 '삼한산두' 넉자가 찬연하니, 일사의 내용과 서로 딱 맞았다. 절의 주인과 상의하여 내가 사는 집으로 옮겨두고, 두루 비신을 찾았지만 찾지 못하여 오래도록 아쉬운 마음을 금치 못하였다. 이때 심양에 사는 여러 현자들이 그 사연을 영원히 하고자 하여' 삼학사유적보존'를 발기하였다. 각자 나누어 성금을 모아 새로 비신과 귀부를 조성하고 여기에 비액을 얹어 다시 세웠다. 이로써 충절의 기상은 위로 해와 별을 꿰뚫으니, 세상이 변하여 때로 숨겨지기도 하지만 결국 영원히 묻히게 하지 않으며, 사람들의 말없는 느낌은 귀신의 기호와 상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영원토록 보존되어 흙더미 속에 묻히지 않게 되기를 후세의 군자들에게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짓는다.

인조 병자년으로부터 300년이 지난 을해년 봄 3월에
창원 황윤덕이 삼가 짓고 경주 김구경이 삼가 쓰다.
(번역 이승수)

그러나 삼학사중수비를 세운 조선동포들의 염원은 1966년 중국의 문화혁명 소용돌이를 비켜가지 못하였다. 홍위병들이 이비를 강변에 내다 버렸고, 이후 어느 중국인의 집 주춧돌에 놓인것을 당시 랴오닝대 교수이자 중국과학자협회 부이사장인 천문갑(현 발해대학장)이 인민페 5천위안에 구입하여 발해대학에 갖다 놓았다고 한다.

역사와 현실은 항상 이데올로기의 관계선상에 있는 것인지, 삼학사의 유일한 현장 유물인 중수비는 어떤 연유인지 훼손되고 방치된체 한. 중 국제교류의 개화 시대에 이르기 까지 질곡의 역사를 지켜왔다.

삼학사재중수비(三學士再重修碑)

1997년 허창무. 신청등이 성남문화원 부원장으로 남한산성의 문화권역을 학술적으로 재 조명하고 '삼학사 모시요!'등 사업을 개시하였다. 한편,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사람들(남사모)의 모임이 결성되면서 본격적인 삼학사 정신선양의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경기도가 남한산성 행궁을 복원하고 산성복원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삼학사에 대한 성남 광주 문화권역의 연대가 이루어 진것도 역사되찾기의 맥락에서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광주문화원이 주관된 현절사의 삼학사 추모제가 언론의 관심으로 등장되었다.

2004년 허창무. 신청. 고재혁.서학선등이 주도하여 요녕발해대학교후원회(회장 허창무)를 결성하고 동년 12월 발해대학에서 첫번째 삼학사추모제를 고재혁 주도로 올렸다.

이를 계기로 방치되고 훼손된 삼학사중수비의 복원이 활발하게 논의되던중 계룡건설 장학재단(이사장 이인구)이 후원하여 2005년 7월 30일 드디어 요녕발해대학 교정에 삼학사 재중수비와 학사정을 세웠고 방치된 중수비도 발해대학내 보관 전시하게 되었다


삼학사재중수비는 중수비와 같이 용두 2m. 폭83cm.두께 26cm. 높이 390cm로 거북형상의 비대로 비두와 함께 학자들의 고증에 따랐다고 한다. 한편, 계룡건설장학재단은 요녕발해대학에 세운 똑같은 모조비를 동년 8월 31일 천안 독립기념관에도 건립하여 삼학사의 충정을 후대에 귀감토록 하였다.

후일의 사가들은 병자호란 당시 항복문서를 쓴 사람도, 이를 찢은 사람도 "열지자 충, 결지자 충"의 양시론(兩是論)을 펴고 있어 사관의 객관적 접근이 아쉬운 현대사회의 기류이다. 




삼학사추모제의 참가는 심양시의'한국주간'에 성남예술단장으로 수 차례 방문한 민간차원의 문화사절 사명에 또다른 한국인의 기상을 의식한데서 느낌이 깊다.

삼학사의 항쟁이 베어있는 역사의 현장인 남한산성 문화권에 하루빨리 삼한산두(三韓山斗)의 삼학사비가 세워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김성태 st3845@hanmail.net/경기예총 수석부회장

기사등록 : 2006-01-04 14:29:18

 

* (관련자료)

* 삼학사 추모제 회고 (2005년)

삼한산두(三韓山斗)의 삼학사(三學士) 재 중수비 - 2005. 12. 22. 중국심양 발해대학 교정에서 본인 촬영 

(조선의 태산과 북두-태산같이 높고 북두칠성같이 빛나는 분)

 

삼학사(윤집. 오달제. 홍익한) 재 중수비가 세워진 중국심양 발해대학 교정에서 -2005. 12. 22. 

'삼학사 추모제'를 위해 2005. 12. 21.~12. 25. 중국심양 발해대학 방문 중)

 

삼학사 추모제에 헌화하는 김성태(성남타임즈 편집인) -2005. 12. 22.

 

삼학사 추모제 준비과정을 지켜보는 참석자들.(좌에서5번째가 발해대학 문갑 학장) -2005. 12. 22. 중국 심양 발해대학 강당에서 

 

훼손되어 방치된 삼학사비를 보관하고 있는 발해대학 전시관에서 -2005. 12. 22.

좌 : 염창순. 고재혁. 김성태. 류수남. 신청.

 

 

 

 

 수양산에서 내린 물이 이제의 피눈물 되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여흘여흘 우는 뜻은,
이대도록 나라 위한 충절을 못내 슬퍼함이라.
주욕신사니 내 먼저 죽어져서,
혼백이 되어 고국에 돌아감이 나의 원이러니,
어허! 오랑캐의 티끌이 해를 가림을 차마 어이 보리요

                                                                     - 홍익한-

성남을 방문한 발해대학 천문갑 학장과 -2005. 12. 1. 분당에서

좌: 류수남. 허창무. 조윤제. 고재혁. 이혜심. 천문갑. 김성태.

 

삼학사 추모제 참석일행이 심양공항에서 심양조선족노년예술단원들의 환영 꽃다발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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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학사비 관련>

(성남뉴스넷 맹교수 사랑방 이야기 중 "독립기념관 가는 길" - 퍼옴

본디 삼학사비는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의 충절을 기리고 그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청태종(淸太宗)이 제단을 모으고 세운 비였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 파괴되고 민멸하였기 때문에 ‘삼한북두’라는 네 글자만 있는 비액(碑額)을 가지고 1935(丙子)년 3월에 요녕성 심양에 거주하는 한국동포들이 ‘삼학사유적보존회’를 결성하여 성금을 모아 비신(碑身)과 귀부(龜趺)를 갖추어 심양에 다시 세운 것이었다.


그 후 중국의 문화혁명기(1966∼1976)에 파손되었다가 훈허(渾河)에서 어느 농부가 비신만을 보관하고 있는 것을 천문갑(千文甲)교수가 요녕대학에 임시보관하다가 발해대학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는 터에 한국 성남시의 지원을 받아 허창무교수(발해대학후원회장) 전보삼교수 고재혁씨 김성태씨 신청씨 서학선씨 등이 협력하고, 2005년 계룡건설(계룡장학재단) 이인구(李麟求) 명예회장의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받아 원형대로 2기를 모조하여 하나는 발해대학 구내에 세우고 하나는 독립기념관 부지에 세운 것이었다. 따라서 이 비들은 재중수비(再重修碑)에 속하는 셈이다.


이인구회장은 2006년 발해대학 구내에 학사정(學士亭)을 준공하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으며, 현재 독립기념관 삼학사비 옆에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는 광개토대왕비도 2004년에 그가 세워 놓은 것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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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문학 발해대학 학장 사망이후 폐교된 발해대학 교정에 있는 삼학사 비(돌보는 이 없어 잡초만 무성)-인터넷 퍼옴



성남문화재단은 원점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문화는 문화 다워야 한다.

문화가 문화적이지 못하면 문화는 이미 사이비보다 못한 탈 문화적 집단에 불과하다. 문화가 그 어느 분야보다도 신뢰와 존경을 받는것은 문화가 정신가치의 규범을 최우선으로 지향하고 있어 범 사회적 표상이기 때문이다. 문화집단이 그 존재가치를 스스로 괴도이탈했다면 이는 이해차원이 아니라 비난과 질타를 자초한 꼴이고 과감한 개혁과 수정이 불가피하다.

성남문화재단!
재단의 설립 과정에서 공론화된 시민사회의 지배적 의견은 재단의 주 업무가 아트센터의 운영관리 여서는 않된다는 것이었다. 재단의 관리감독하에 아트센터를 두던가, 아니면 독립기구화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재단의 상임이사가 아트센터 사장을 겸직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1인 채제의 독식을 막기위해서도 필요한 대목이었다. 그러나 개관일을 명시한 시한부 아트센터의 개관배경은 다분히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고 재단설립은 여론을 무시한체 밀어부치기식으로 결론지어졌다.

재단의 인력시스템
외인부대를 연상케 하는 전형적 모델이라는 것이 지역 주민들의 여론이다. 인사규정도 자의적 탈법에 가까운 전횡으로 이루어 졌슴이 시의회 사회복지위의 행정사무감사에서 백일하에 드러났다.

71명의 직원중 39명이 특채
나머지도 서류심사와 면접만을 통한 사실상 전직원이 특채이고 더구나 미자격자를 특채 4개월만에 부장으로 승진시키는등 제멋대로의 인사가 이루어 졌다는 지적이고 보면 아트센터 사장의 화려한 전직 케릭터(?)와 전직원 전문가 인력시스탬 평가에 개별적 재 심의가 이루어져야할 부분이다.

재단의 급여 및 인건비
재단 임직원의 급여가 성남시 공무원 보수표에 준한다는 규정을 무시하고 운영수당(20%) 및 시간수당,각종수당을 전직원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하여 재단 출범이후 매일 시간외 수당과 출장비로 매일 5시간씩 150,000원을 일률적으로 지급하였고, 공무원의 경우 1시간당 수당이 8,500원이나 재단은 14,986원으로 2배 가까이 높게 책정되고, 휴일수당 또한 공무원의 경우 62,810원이나 재단은 119,890원. 급여또한 공무원 6급 32호봉이 월 437만원에 비해 이 직급에 해당하는 재단 4급이 542만원으로 책정 되어 공무원과 70만원~150만원의 임금격차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고 보면 재단의 자의적 종횡이 예산집행의 부실 을 가져온 결과이다.

재단의 내년도 예산
재단은 06년도 예산으로 2백13억원을 수립하고 이중 53억원(25%)은 아트센터의 각종 공연수입, 아카데미 프로그램 수강료, 극장 및 전시관 대관료로 충당하고 160억원(75%)은 성남시의 출연금으로 조달한다는 계획이다. 재단의 자체수입금(?) 인 53억원은 재단이 책정한 임직원 인건비 51억원에 가까운 예산으로 아트센터의 직접운영 수입금이 겨우 임직원 급여에 충당되고 마는 결과여서 시급한 개선이 필요하다는 여론이다. 행정사무감사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개선되지않은 예산을 시의회에 올렸다는것은 참으로 개탄스러운일이다.

재단의 운영경과 과정
아트센터 개관을 경축한다는 명분하에 치뤄진 급조된 "탄천 페스티벌"은 경기도에서 성남대표축제로 지칭된 세계민속예술축제를 무시한 처사였다. 개막과 폐막행사에 방송프로와 대중연예인을 투입하는등, 문화예술 전문인력이라고 자처하는 재단의 기획력과 사고가 의심되리만큼 4억3천만원의 예산을 전용집행하였다.

탄천행사 무대제작 업체(STAGE)에 용역비 350만원을 체불하고 예산이 초과되어 200만원은 못주겠다고 시의 신용을 실추시키는등, 세계민속예술단 섭외 업체와 사업계약 및 예산임의 조정 휴유증등 잡음이 많아 재단이 과연 시예산을 집행하는 공공재단인가를 의심게하는 주먹구구식 기관으로 전락한 느낌이다.
개관페스티벌 메인 프로그램도 지역의 공청회나 설명회가 있어 프로그램 선정에 따른 예산집행의 투명성과 효율성도 재고되었어야 한다.

외부 프로그램의 홍보 극대화에 비해 지역의 참가프로그램은 개관 직전까지 재단 홈페이지나 홍보책자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고, 개관 예산 44억3천8백8십2만8천원 책정에 15개 성남지역 예술단체에 고작 3천8백50만원이 편성되는등 재단의 독선적 결정은 지역문화계의 비난과 원성은 물론, 성남예총과 9개회원예술단체 각 지부의 항의 질의서까지 받아 재단의 철저한 지역성 무시와 외부공연의 들러리로 전락하는 자괴감으로 성남아트센터의 정체성을 의심케 하였다.
아트센터 광장의 영구조형물인 핸드프린팅도 외부인사를 포함한 선별에 객관성이 결여되고 편의적으로 선정되었다는 논란이 재기되어 재 첨가하는등 설치물 표기도 오류가 많아 재 수정이 불가피하다.
개관식에서의 역대 아트센터 계획에서부터 관계한 지역인사들의 초청은 배려하지 안고 외부인사중심의 pr성 의전문제 또한 지탄이 되었다.

재단 최고의 홍보 마켓팅 전략이 집중된 재단자체제작 오페라 "파우스트"는 8억원의 예산이 투입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작품제작 및 연출자 선정의 개연성으로 출연자들이 선정되었다는 가정에서도 자체제작이 갖는 예술적 저작권과 이후의 재활용(재 공연및 타지에 판매권)을 위해서라도 당연히 부천시립합창단 이 아닌 성남시립합창단과 프라힘오케스트라(서울의민간단체)보다는 성남시향을 프로그램 공급자로 출연시켰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한 시민회관에서 중원, 수정구민을 위해서도 재 공연을 준비함이 지역주민에 대한 배려이다. 재 공연을 위해서는 그때마다 상당한 시예산을 지불해야만 한다. 시립 예술단체를 선정했더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과연 1회적(총 4회공연)인공연물을 자체제작이라고 의미부여를 할 수 있을찌도 의문이다. 또한, 7세이상의 관람가인 공연물에 전나체에 음모까지 드러내고 성적연기를 서슴치 않는 공연물을 수천명이 관람하는데 재단은 사전의 진단을 했어야 한다.
출연진의 노출과 선정성은 작품의 전체 분위기, 필연성, 연출의 고유성에 따라 작품완성도에 영향을 준다고는 하겠으나 관람객의 분포 ,연령,지역성, 예술적 수준에 따라 의견을 달리할 수 있다. 성남 공공문화재단 최초의 자체제작 공연물에 전나체의 출연을 등장시키고 7세이상의 청소년 입장을 결정한 것이 과연 재단의 전문적 예술성인지 따져보지 않을 수 없고 이에대한 책임도 전적으로 재단에 있슴을 유념해야 한다.

재단이 발행하는 월간 아트뷰는 solution co,ltd 디자인과 (주)백산인쇄를 선정하여 월 1만부 제작에 1500만원의 예산을 드려 전국의 문화재단중 최호화판으로 발간,부천문화재단의 8000부에 발간비 80여만원과 비교해 볼 때 상상이 안가는 규모로 시정을 해야한다는 지적이다. 아트뷰등 재단홍보지에 게시되는 광고 수입은 디자인 업체의 자체영업성과에 맡긴다고 한다면 이에대한 특혜소지도 떨칠 수 없는 의혹이 있다는것이 여론이다.

한편 명품 및 외제 자동차 업체들의 광고게제 조건으로 아트센터는 한달이상 1억4천8백만원의 "제규어'를 전시하는등 '아우디'도 전시되어 재단의 공공성이 훼손되고 있으며 지역주민 다수의 위화감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아트센터내 uptown, LG하운드, 구내식당 위탁업체 선정에도 심사배점에서 심사항목중 사업제안서에 50%의 비중을 두고 가장 중요한 입찰금액등의 배점이 뒤로밀려 대형업체만의 입찰이 가능케 하였다는 것이고 보면 이또한 재단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잃었다는 지적이다.

재단의 부실운영은 과히 '종합병원'을 방불케 한다는 것이 시의회의 지적이다.

재단은 그동안 공연 및 전시 프로그램에 투입된 예산과 입장수입, 미술장식품 구입예산및 선정결과등 모든것을 시민사회에 투명하게 밝히고 새로운 개혁의 진로모색을 위한 사회적 공감대를 만드느데 심기일전 해야 한다. 시민사회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은 재단의 정상화를 위하여 필요하고 이는 재단 스스로 풀어야 할 몫이다.

누군가 말했다.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획일주의가 압도할 때 인간은 언제나 부끄러운 역사를 남긴다."고 말이다

문화불모에서 출발하여 오늘의 성남문화 역사를 일구면서 가슴시린 문화예술 현장을 살아온 이땅의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애써 침묵하며 참고 기다리는 인내의 한계를 재단은 헤아려야 한다.

성남문화재단! 오늘 그들이 성남문화의 점령군으로 당연시하는 그 호사스러운 자리에서 과연 당당히 외칠수 있는가? "성남문화의 미래를 열어갈 파수꾼으로 시민의 문화적 삶의 질 향상에 희생과 봉사자가 되겠노라"고..

김성태 st3845@hanmail.net.
기사등록 : 2005-12-18 17:32:42
성남문화재단의 총체적 부실
성남문화재단에 대하여 6일에 있었던 성남시의회 사회복지위원회(위원장 윤광열)의 행정사무감사에서 밝혀진 결과는 한마디로 "총체적 부실운영"으로 드러나고 있다.

참으로 개탄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성남문화재단은 성남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미래지향적 문화도시를 구현하여 시민의 문화적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성남시 조례에 의하여 설립된 공공재단이다.
그러므로 재단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인적 시스템의 기본적 요건은 당연히 문화가치의 철학을 지닌 전문인력으로 구성됨이 원칙이다. 여기에는 성남시민으로 살아가는 긍지와 애정을 가진 정신적 자세를 포함한다.

이에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재단의 운영또한 가장 문화적인 절차에 따라야 함도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문화의 가치추구는 가장 상식적이고 보편타당한 논리의 결과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작금 성남문화재단의 운영은 탈 문화적이어서 시민들을 슬프게 한다.

인사규정의 탈법,급여책정을 편성한 자의성,전문집단을 자처하는 과시성,문화라는 명분의 작의성,지역정서를 무시한 편의성,등은 오만과 독단으로 문화적 소양과는 상극되는 요소들이다.

성남문화재단이 심기 일전하여 진정으로 봉사와 희생의 자세로 겸손히 행보하기를 기대함은 시민 모두가 문화적 삶의 방향성을 재단에 기대하고 있기때문이다.

/김성태 st3845@hanmail.net.
기사등록 : 2005-12-18 17:30:26

* 성남문화예술제

 * 1986년 예총 창립 연도에 성남총체예술제로 제정. 각 단위협회의 고유행사 및 사업을 중심으로 편성

                                           * 제1회~1992. 제7회까지 「종합예술제」로 집행   (* 1992년 제7회~2001 제16회 까지 대회장 :김성태))

                                           * 1993. 제8회~1996. 제11회 「산성문화제」로 개칭

                                           * 1997. 제12회~2001. 제16회 「문화예술제」로 개칭

                                           * 2002. 태풍 루사 피해로 17회는 2003년 10월 개최

                                           * 현재 9개 전문 예술단체 행사 외에 시민 참여 행사, 청소년 참여행사, 사회단체 부대 행사로 구분, 편성?총괄 집행

                                           * 연계 행사로 시민 백일장(문학강좌), 국악제, 무용제, 연극제, 시민노래자랑, 음악제, 미협회원전, 사진작품전, 영화제 병행

 

 

*  성남예총 제3대 김성태회장 취임 후 첫번째 집행한 제 7회 성남종합예술제(현 성남문화예술제)와 시민의 날 경축예술제(예시자료)

 

 

 

 

 

 

성남시 사회단체들이 '성남사랑, 예술사랑' 현수막을 들고 시가퍼레이드에 참가

성남 예총 회원단체도거리 퍼레이드에 참가...(오성수 성남시장이 성남국악협회 방영기 지부장과 개회식장으로입장하고 있다)

 * 개막 축하 테이프 절단- 회원단체 각 지부장과 기관단체장들...1992. 10. 9. 성남시민회관 광장

좌 : 김종해(무용). 이광용(사진). 정금란(경기무용협회장). 김건중(문학). 남기중(음악). 이대교(미술). 이용상(성남문화원장). 오성수(성남시장).

김성태(성남예총 회장, 예술제 대회장). 이용기(성남교육장). 임홍규(성남예총 초대회장, 고문).*. 조영육(연예, 성예총 부회장). 방영기(국악).

 

 

 

개막식 -좌 : 이용상(성남문화원장). 오성수(성남시장). 이용기(성남교육장). 김성태(예술제 대회장). 임홍규(성남예총 초대회장, 고문) 등

 

개막 축하 점화 

각 회원단체 지부장 및 시가퍼레이드에 참가팀, 관객 -성남시민회관 대강당

 

좌 : 오성수 성남시장. 이용기 성남교육장. 김성태 예술제 대회장. 임홍규 성예총고문. 

대회사를 하는 김성태 성남예총 회장 

축사- 오성수 성남시장 

축가 - 어린이 합창단

부대행사 중의 꽃꽂이 전시(시민회관로비) 

개막축하연을 겸한 성남미술제 (시민회관 전시실) 좌 : 임홍규. 김성태. 이대교. 허윤희 

 시가퍼레이드 참가 팀 중 (한복자랑 시범단) 



*1992,  제7회 성남종합예술제(대회장 김성태) 개막축하연 중 정금란(투병 중)과 왕자로 분한(한복자랑 쇼 출연) 아들 윤과 필자


좌 : 김성태. 송태옥(경기예총 회장). 나영수 (원로 합창지휘자) 

 

*종합예술제 중 시민 및 청소년 참여 각종 예술경연대회 종합시상식

 

* 예술제 관계자료사진(이하)

 

 

 

 

특설무대 아래서 리허설을 직접 연출 및 진행을 하고 있는 성남예총 회장  김성태

 

* 문화예술제를 범시적으로 극대화하기위한 방안으로 각 기관, 의회 사회단테로 추진위원회를 구성, 기획, 편성, 집행, 예산등광범위한

각계의 의견과 방향성을 논의구조로 했다. 사진은 김병량 시장, 염동준 의회의장 등이 참석한 13회 추진회의- 1998. 8. 28. 성남시청대회의실 

성남시민의 날 경축에술제시가 퍼레이드팀을 환영하는 기관 ,단체장들 

1992년 개시된 '새봄맞이 예술축제' 현수막과 좌 :김정진 성남예총 사무국장과 김성태 회장 

 

                                   * 정례사업으로 정착된 예술제 프로그램 중 -성남문화예술제 (제14회 )      1999년 10월                                 

 

일시

  시간(기간)

행    사    명

장     소

8일

금요일

~17(일)

인터넷 성남 문화예술제

인터넷 가상공간

~17(일)

성남 문화예술제 기록 사진전

행사장 일원

~12(화)

성남 과거와 현재의 얼굴전

시청 로비

~11(월)

성남시 화원연합회 제2회 꽃꽂이 작품전

분당 중앙공원 수내동 가옥 앞

~14(목)

모란시장을 다시 디자인한다

시민회관 로비

  19:30

성남 문화예술제 전야 경축 음악회

시민회관 대강당

9일

토요일

~17(일)

상설기획 전시

시내 일원

~10(일)

시화전(징검다리, 성남)

분당 중앙공원 내

~10(일)

분당 로데오거리 축제

서현역 로데오거리

~17(일)

‘99 열린 서예전

분당 중앙공원 내

~15(금)

성남 문화예술제 ‘사진작품전’

한신코아 6층 전시실

  11:00

예술순회공연

신흥주공아파트 관리사무소 앞

  14:00

한신코아 정문 앞

  17:00

 

중앙공원 분수대 광장

  18:00~19:00

성남 문화예술제 ‘개막 행사’

분당 야외 공연장

  19:00

시민 노래자랑

분당 야외 공연장

  21:00

‘99 성남 난장축제

분당 야외 공연장

10일

일요일

  10:00

만화그리기 및 만화 장착 전시회

분당 중앙공원 내

  10:00

시민 백일장

분당 중앙공원 내

  11:00

제14회 성남 학생 무용 경연대회

시민회관 소강당

  14:00

‘99 어린이 조형예술제

야외공연장 일대

  15:00

경기도 지정 무형문화재 시연

중앙공원 분수대 광장

  13:00

삼성플라자 로데오거리

  15:00

예술 순회공연

야외공연장 원형 광장

  17:00

율동공원 내

  16:00, 19:00

성남 문화예술제 연극제 ‘좋은 녀석들’

시민회관 대강당

  17:00

상설공연

남한산성 유원지 내

  18:00

문학강연, 시낭송

시민회관 소강당

11일

월요일

  10:00

동별어머니 합창 경연대회

시민회관 대강당

  14:00, 16:00

‘성남 고교연극제’ 불곡고 ‘알을 깨고 나오는 새야’

시민회관 소강당

  17:00

예술순회공연

상대원 성경아파트 내

12일

화요일

  10:00~11:30

영화제 ‘로보트 태권 V'

시민회관 대강당

  15:00~19:00

영화제 ‘아름다운 시절

시민회관 대강당

  14:00

장수노인 사진 찍어주기

분당 중앙공원 내

13일

수요일

~17(일)

성남문화예술제 ‘미술작품전’

초림역

~17(일)

모란장 프로젝트

시청 로비

  10:00~11:30

영화제 ‘로보트 태권 V'

시민회관 대강당

  15:00~19:00

영화제 ‘내 마음의 풍금’

시민회관 대강당

  10:00

예술순회공연

혜은학교

  16:00

‘성남 고교연극제’ 계원여고 ‘가스펠’

시립청소년수련관

14일

목요일

~18(월)

‘99 성남 전국 분재축제

분당구청 앞 녹지대

~15(금)

향토 인물 학술회의

문화원 강당

  10:00

제4회 성남학생 국악 경연대회

시민회관 소강당

  14:00

‘성남 고교연극제’ 낙생고 ‘제3의 교실’

시립 청소년 수련관

  15:00

성남문화예술제 ‘국악제’

시민회관 대강당

  17:00

상설공연

모란장터 내

  19:00

‘99 시민을 위한 영화제 ’타잔‘

중앙공원 잔디광장

15일

금요일

~16(토)

제11회 성남 전국 시조, 가사, 가곡 경창대회

시민회관 소강당

  11:00

예술순회공연

성은학교

  14:00, 16:00

‘성남고교연극제’ 성보정보산업고 ‘우리로서는 소리’

시립 청소년 수련관

  19:00

성남문화예술제 ‘음악제’

시민회관 대강당

  19:00

‘99 시민을 위한 영화제 ’유령‘

중앙공원 잔디광장

16일

토요일

  13:00

전통놀이축제의 장(강정일당상 시상식)

중앙공원 광장

  14:00, 17:00

마당놀이 ‘동방삭전’

남한산성 유원지 내

  15:00

성남문화예술제 ‘무용제’

시민회관 대강당

  14:00, 16:00

‘성남고교연극제’ 분당중앙고 ‘방황하는 별들’

시립 청소년 수련관

  17:00

‘영화제’ ‘로보트 태권 V'

시민회관 대강당

  19:00

상설 청소년 문화 축제(댄스경연)

분당 야외 공연장

~17(일)

시화전(징검다리, 성남)

남한산성 유원지 내

~17(일)

분당 로데오 거리축제

서현역 로데오거리

17일

일요일

  10:00

가훈 써주기

중앙공원 돌마각

  11:00

탄천살리기 시민 한마당

분당구청 뒤 찬천 고수부지

  11:00

‘99 성남사랑 어린이 조형 미술대축제

황송공원

  11:00

상설공연

황송공원

  13:00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활제작 및 활쏘기대회

남한산성 유원지 내

  14:00

성남 교향악 축제

분당 율동공원

  15:00

성남 시민과 함께 하는 외국인 민속놀이 한마당

시민회관 대강당

  15:00

상설 청소년 문화의 거리축제 ‘방송영상제’

분당구청 회의실

  17:00

가야금 인간문화재 이영희선생 초청 공연

시민회관 소강당

                              

                                 

 

 

                

 


                                                                                                           


 

* 성남예총의 개황

성남예총이 1986년 2월 17일, 한국예총으로부터 창립 인준을 받고 성남 예술단체 및 예술계를 대표하는 단체로 출범하기 전까지는

 1977년 봄 권기흥(權奇興)의 발의로 각 예술분야의 연합 성격으로 창립된 가칭 「성남문화예술인총연합회」가 법적 구성 요건은

갖추지 못하였으나 성남예총이란 명칭으로 활동하였다.

가칭 「성남예총」은 제1회 「성남 명사 취미전」, 「거북이 마라톤」 등 행사를 개최하여 구심력을 찾으려고 노력하였으나 지역

사회에 가시화되지 못하고 친목상태의 명분만 유지하다가 1985년 10월 정식 예총 창립을 위한 추진 모임을 주선하면서 발전적으로

 자동 해체되었다.

가칭 성남예총에 임원을 역임하였던 사람으로는 회장에 권기흥, 부회장에 이대엽(李大燁), 박성준, 리재범(李載範), 조윤제(趙潤濟)

 등이며 박승빈, 김한성, 유해수, 정금란, 전옥녀, 임영창(林泳暢), 강신자(姜信子), 배정웅(裵正雄) 등이 참여하였고 사무국장에

 김은집(金銀集), 황인태(黃寅台), 김성태(金聖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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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남은 1977년 권기흥(작가)을 중심으로 '성남문화예술인총연합회'를 결성

 1977년 7월18일-23일 '성남명사취미전'(성남최초의 종합전시회)을 개최하는등 1986.2월 발전적 해체에 이르기 까지

 성남예총의 창립모태로 친목중심의자생적 활동을 통하여 성남향토문화예술발전을 모색 하였다.)

  *사진은 소산 김은집의 한국화 개인전 기념

- 앞: 유해수(수필가.작고). 이대엽(영화). 김은집(한국화). 권기흥(문학. 작고). 권오호(한학)

- 뒤: 송종권. 김성태. 김한성(서양화).황인태. 이은명. 원창상(문학). 김용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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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남최초의 '성남문화예술인연합회'를 결성하고 친목을 중심으로 지역문화발전을 구상한 사람들로

  이모임이 1986년2월 성남예총의 창립의 발전적 모태가  되었다.)

-1978년 여름 은행동에서. 좌:황인태. 김성태. 권기흥.*.이대엽.유해수.*.박승빈.김은집등.-


 

 1985년 10월 김각현 시장의 독려에 자극되어 권기흥이 앞장서 성남예총 창립을 위한 준비 모임이 몇 차례 성사되었으나 주도권 갈등으로

 마찰을 빚기도 했다. 연이어 개최된 창립 대의원 총회에서 임홍규(林弘圭)가 초대 지부장에 선출되었으나 미술협회가 참여하지 않고

 임홍규 미술협회 회원 자격을 제명하는 등 한국예총에 이의를 제기하여 인준이 보류되는 진통을 겪기도 했다.

동년 12월 미술협회(지부장 : 남궁원)를 제외한 문인협회(지부장 : 리재범), 국악협회(지부장 : 이준식), 무용협회(지부장 : 정금란),

 연극협회(지부장 : 주수광), 연예협회(지부장 : 조이수)가 대의원 총회에서 기 국악협회 이사로 소속되어 있던 임홍규를

 재선임(부지부장 : 리재범. 조이수)하고 1986년 2월 17일 한국 예총(회장 : 조경희)의 창립 인준을 받았다.

동년 3월 20일 창립 기념식은 행정학교 군악대를 비롯하여 연극협회원들의 가장 행렬, 국악?무용협회원들의 거리 춤 행진 등

성남 최초의 시가 퍼레이드를 펼쳤고, 기념식장(시민회관 대극장)에서의 국악?무용?연극?연예 축하공연과 미술작품전,

창립축하연 등을 성대하게 개최하여 성남예총의 창립을 가시화하였다. 창립식에는 한국 예총 조경희 회장과

김각현 시장 등이 참석하였으며, 사무실을 신흥1동 반공회관에 설치하고 업무를 개시하였다.

성남예총 창립 인준 초대 임원에는 지부장 임홍규, 부지부장에 리재범(문학), 조이수(연예), 상임간사 주수광(연극),

간사에는 문학에 현장송, 안성호, 국악은 이준식,김성태, 김상규, 무용 정금란, 김종해, 연극은 김기세,

연예는 김건아,조영육, 감사에는 이순림(무용),윤준상(연극), 초대 사무사진국장에 최인식(崔仁植)이었다.

 

 창립축하연-좌:*. ).천창봉(경기예총회장).이재범(성문학지부장).*.권기흥(소설가.)조경희(한국예총회장).임홍규(성예총 초대회장). 이상우(한국예총부회장).

권귀태(성남시부시장).조이수(성연예협지부장). 주수광(성연극지부장). 정금란(성무용협지부장) - 2006.3.20. 성남시민회관 전시실

 

                                  

                                             *  성남예총창립 및 현판식-1986.3.20.

                                      

                                     * 창립 축하연 - 좌: 권귀태)부시장). 조경희(한국예총회장). 김성태.임홍규)초대성남에총회장). 천창봉(경기예총회장).등

                                             -시민회관 전시실

                

1986년 9월 19일~10월 6일까지 제1회 「성남종합예술제」를 제정하고 각 회원 단체별 주관 연계 행사로 음악제,

시민 노래자랑, 고교 연극제, 국악제와 국악 경창대회, 무용제와 무용 경연대회, 성남 미술대전을 총괄 개최하는등,

연례 사업으로 확정하여 시 승격 10여년 만에 비로소 종합예술제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이즈음 성남 어머니합창단(단장 : 전옥녀) 성남서화작가회(회장 : 이대교), 조형작가회(회장 : 김규수),

 성남음악교사회(회장 : 남기중), 성남사진동우회(회장 : 이광용) 특별회원 단체로 영입되어 협조하였다.

 9월 26일~10월 17일까지 제2회 성남종합예술제와 미술대전을 개최하였고 시민 백일장과 문학 강좌를 주관하면서

문인협회가 예술제에 참여했다. 사진작품전이 특별회원 단체인 성남 사진동우회 주관으로 단대쇼핑 문화 홀에서

개최된 것도 이채를 띠었고, 1987년 10월 24일 음악협회(초대 지부장 : 남기중)가 창립 인준되어 6개 회원 단체가 구성되었다.

 

 

 

 

 

1988년 7월 22일 창립 2주년 기념식에서 「성남예술상」을 제정하고 제1회 수상자로 박태현(동요 작곡가),

윤복호(사진작가), 지교대(공예가)를 수상하여 예술인 권익 신장과 업적을 기리는 예술상 제도를 연례 사업화하였으며

동년 4월 9일 사진작가협회(초대 지부장 : 오종창)가 창립 인준되어 7개 공인 예술단체가 회원 단체로 확대되었고.

동년 10월 31일부로 성남 예총 창립 이후 3년간 참여하지 않았던 미술협회가 입회하여 8개 회원 단체로 증가되었다.

1989년 2월 20일 성남예총 제2대 지부장에 임홍규가 피선(부지부장 : 리재범?조이수) 연임되면서 2대 회기를 개시하고

  10월에 개최된 제4회 「성남미술대전」을 미술협회 성남지부(지부장 : 남궁원)가 주관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 3월 22일 창립 제4주년 기념식과 제3회 성남예술상(수상자 : 윤영복(서예)) 시상식을 개최한 후

 6월 4일 임홍규는 임기 중 돌연 사임하였다. 조이수(趙二秀)가 지부장 직무대행으로 제5회 종합예술제를 집행하고

 1991년 1월까지 대행체제를 유지하였다.

임홍규는 초대 지부장으로 예총 창립 과정의 갈등을 극복하고 열악한 예술 환경 개선에 노력했으며, 「성남종합예술제」와

단위사업의 연례화, 「성남미술대전」 제정, 「성남예술상」 제정 등 성남 예총의 발전적 기초를 마련하였고,

기관 단체장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위원장 : 정형주)를 운영하는등 성남 문화예술 풍토 조성에 일조하였다.

1991년 2월 21일 남궁원(南宮院)이 2대 잔여 임기 지부장(부지부장 : 김건중?오종창)에 보선되어 회보 발행,

까치골 후원회 구성, 예술인 야유회 등을 개최하면서 대행체제의 공백기를 정비하던 중 지방자치 최초로 실시된

경기도 교육위원 출마 여파로 동년 8월 20일 재임 6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오종창(吳鍾昌, 사진)이

지부장 직무대행으로 10월 5~23일까지 제6회 성남 종합예술제를 집행하고 2대 회기를 마쳤다.

성남 예총 2대 회기를 맡은 임홍규,남궁원의 지부장 중도 사태가 빚은 지역사회의 불신 의혹과 대행체제에서 오는

 행정의 공황과 불안 요인이 가중되었으나 한편 회원 단체들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자구적인 노력과 결속 의지가

형성된 점도 간과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1991년 12월 14일, 김성태(金聖泰)가 제3대 지부장에 선임(부지부장 : 최종소(미술), 남기중(음악), 조영육(연예)가 되었다.

 1992년 1월 사무실을 반공회관에서 신흥3동 3435(구, 농촌지도소)로 옮기고 15일 취임식을 가지면서 3대 회기를 출범하였다.

 

 

               

 

                   

                             좌: 이대교(부회장).조정자(미협이사).박용준(음협이사).서북진(시립합창단 지휘자).최종소(미협지부장). 김성태(회장).

                                  남기중(부회장,음협지부장).방영기(국악지부장).조성일(연극지부장).이혜선(국악협 이사)(뒷줄 좌: 김정진(성예총 사무국장)

                                 .김월순(무용협 이사).이광수(연극협 이사).장근경(성예총사무간사).

 

 

성남예총 초대, 2대회장 임홍규와 3, 4, 5대 회장 김성태 - 1992년 성남종합예술제 개막식 대기중 담소(시민회관 귀빈실)

 

     *  성남예총  제3대 김성태회장 취임식- 강선영(한국예총회장).*. 임홍규(성남예총 고문). 송태옥(경기예총회장)-

                                             1992.1.18. 성예총강당(신흥동 구 농촌지도소 회관)

 

취임식에는 강선영 한국예총 회장 등이 참석했다. 동년 3월 20일 창립 6주년 기념식에서 「성남사랑, 예술사랑」

 캠페인 운동 전개를 선포하고 제5회 성남예술상(수상자 : 임홍규, 서예)을 시상하였으며 사무국장에 김정진(金貞進)을 임명하였다.

동년 4월 10~16일, 제1회 「새봄맞이축제」를 재정 집행하여 9, 10월에 집중된 예술행사를 연중 편성하는 작업을 개시하였다.

1992년 7월 1일 제19회 시민의 날을 문화행사로 전환하여 예총의 기획과 주관으로 집행하게 되면서

또 하나의 비중 있는 예술행사를 총괄하게 되었다.

 

 

제19회 성남시민의 날 경축 타북 

시민의 날 최초의 「시가 퍼레이드」는 성남경찰서, 남부경찰서, 시청, 수정보건소, 새마을지도자성남시협의회,

 새마을부녀회, 바르게살기성남시협의회, 해병전우회, 특전전우회, 파월전우회, 연극협회, 무용협회, 성남농악단,

선진질서 성남시협의회, 풍생고교, 낙생고교, 성일상고, 밴드부, 양영실고, 돌마국교 농악단 등 2,500명이 참가한

시가 퍼레이드로 대봉로, 광명로, 시청 광장을 연결하여 진행되었고 오성수 시장, 손영태 시의회 의장, 시의원,

기관 단체장들이 대거 참여하기도 했다.

제1회 「새봄맞이축제」와 「시민의 날 경축행사」, 10월 9일~29일까지의 제7회 「성남종합예술제」와

경축 「타북」, 7월 11일 「속초예총 자매결연」, 12월 19~21일까지 제정 집행한 제1회 「송년예술제」,

 12월 21일의 제1회 「성남예술인 송년의 밤」 등 성남 예총이 총괄, 제정, 집행한 일련의 사업은 시 예산지원 사업으로

연례화 되는 결과로 이어졌고 더불어 성남예총의 위상과 사업의 공익성이 가시화되었다.

1993년 4월 16일 뉴서울필하모닉오케스트라(지휘 : 김봉)와 시립합창단 협연 초청으로 지역난방공사에서

개최된 음악회는 분당 신시가지 주민을 위한 최초의 예술 공연으로 기록되었으며

 6월 29일 제20회 시민의 날 경축 전야 행사로 제1회 「주부 가요제」가 제정, 집행되고

 8월 28일 제3회 「한여름 밤의 축제」를 분당 초등학교 교정 특설무대에서 분당 최초의 열린 예술 행사로 개최하였다.

 임석봉 시장 등이 참석했다. 동년 10월 9~19일 제8회 성남종합 예술제를 「산성문화제」로 개칭, 명칭 공모와 선정에

 이견이 있기도 하였으나 광의의 문화제 개념으로 의미를 부여하자는 의견을 수용하여 개최하였고 산성문화제

명칭은 제11회 행사 개최 이후 12회 행사부터 「성남문화예술제」로 개칭되었다.

 

                                  

                               

                                                                                                                   *  (성남예총 이사회의 중)

 

1994년 3월 20일 성남 예총 창립 8주년 기념식과 함께 《성남예술》 창간호를 출간, 종합예술 홍보지의 발간을 연례화하였고

 제1회 「성남전국사진공모전」을 성남 최초의 전국 규모 예술사업으로 제정하였으며, 미술대전에 포함되어 있던

 「성남사진대전」을 분리하여 개최함으로써 각 예술 장르의 독자성을 체계화하였다.

1994년 11월 26일 제4대 지부장에 김성태가 연임되어(한국예총 정관 임기 4년으로 개정됨.) 1995년 1월 1일 4대 회기가 출범하였다.

동년 5월 11~16일 제1회 「청소년예술제」를 제정하고 집행하여 청소년 정서 함양과 예술 인재 육성발굴의 장을 마련하였다.

 

 한국예총 신영균 회장이 예총회관건립 국비지원 공조협조차 성남예총을 방문 김성태 회장,오세응 국회의원, 임원진과 만찬후 기념촬영.

앞 좌: 정금란(경기무용협회장.) 오세응.신영균. 김성태.이상우(한국예총부회장).조이수(성남연협 지부장)

뒤 좌: 김정진(성예 사무국장). 성예 사무간사.방영기(성남국악협지부장).김종해(성남무용협지부장).이대교(성남미협지부장).남기중(성음협지부장).조영육(성예부회장).이광용(성사진협지부장). 임홍규(성예총 고문). *한예총 사무총장. -1993.10.24.

 

1996년 6월 30일 제23회 시민의 날 경축 전야제로 「열린음악회」를 연예협회(지부장 : 이영식) 주관으로 종합운동장

특설 무대에서 개최하여 5만 관객을 유치하는 대성황을 거두기도 하였으며, 1996년 「문학의 해」 기념을 계기로

《성남 문학인 작품선집》을 7월 15일 제1집으로 출간하였으며, 매 격년 출간사업으로 제정하여

 문인협회(지부장 : 김건중)가 주관하게 되어 성남문단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동년 8월 27일 성남영화인협회(초대 지부장 : 이경빈)가 창립 인준되어 9개 공인 예술 단체로 성남예총 조직이 확대되었다.

 동년 10월 30일 예총 사무실을 시민회관(2층)으로 이전하고 동년 11월 8일 오성수 시장 등과 예술인 150여 명이

현판식과 리셉션을 갖는 등 예총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게 되었다.

 

                                                        

                                                                         *       시민회관이전 현판식 -1996.11.8.오성수 시장. 김성태회장

 

1997년 3월 21일 「창립 11주년 기념식」과 제10회 「성남예술상」 시상(수상자 : 김종해), 《성남 예술》 제4집 출간, 4월 5~6일 「예술인 세미나」(청평 한록리조트 연수원)를 개최하여 성남문화예술 발전 방향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1998년 「성남문화예술제 부대 행사」가 병행, 개최되어 성남 문화예술제가 더욱 발전적으로 시 전역을 공간화하여 개최되는 계기가 되었다. 동년 10월 16~25일 개최된 제13회 성남 문화예술제 집행 이후 성남 예총은 성남 문화예술제를 총괄, 연대하는 행정센터로 역할과 기능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제1회 「성남 연극인 합동 공연」이 제정되어 맹만재 연출 <시집가는 날>이 장민호, 정상철 외 9명의 국립극 단원과 성남 연극인 합동 공연을 개최하여 또 하나의 성남 연극 연례사업을 개시한 것도 이 때였다.

 

제5대  김성태 회장후보자 소견발표 중 -1999. 1. 23.

남궁원 낙선자에게 위로를... 

5대 김성태 성남예총회장 피선 후 -

 

1999년 1월 23일 제5대 예총 지부장에 김성태(부지부장, 이대교.이영식.박용준)가 피선되어 3, 4대에 이어 중임하게 되었다. 동년 10월 8~17일까지 개최한 제14회 성남문화예술제는 「새천년, 새성남, 문화21」부제로 총 59종의 행사가 성남 전역에서 펼쳐져 시 승격 이후 최대의 총체적 문화예술제의 전형적인 모델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동년 12월 음악, 국악행사 등 단위 행사에 예산 집행에 대한 의혹 사건이 발생하여 수사 기관의 조사를 받고 혐의가 밝혀진 어려움도 있었다.

2000년 5월 24일, 성남 예술인들의 숙원이던 「성남문화예술회관」 착공식에 문화예술제를 대표하여 김성태가 제를 올리고 방영기의 축문 낭송과 부명희, 김영자, 배기숙 등 국악협회원들의 축가, 조성란의 <비나리> 춤이 착공식 현장에서 연희하여 300여 시민들과 기쁨을 함께 하기도 했다. 한편 「모란민속 5일장 축제」를 특화사업으로 성남 예총과 모란 5일장 추진위원회가 공동 총괄하게 되었으며 동년 12월 27일 제1회 「창작동요제」를 전국 단위 음악행사로 제정하여 음악협회가주관하여 창작 동요 육성과 보급에 일조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음악계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2001년 성남문화예술제 부대 행사가 전문 예술 행사를 분리하여 「시민축제」를 시민축제추진위원회(위원장 : 김창봉)가 10월 말 제1회로 개최하였으나 추진위의 내부 갈등과 행정체제의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단발 행사로 끝나 시민축제 자체가 소멸된 것은 매우 안타까운 결과라고 할 것이다.

동년 9월 30~10월 3일 제5회 중국 요녕성 예술제에 요녕성 초청으로 성남예총이 구성한 50여 명의 「성남예술단」(단장 : 김성태)이 참가하여 성남예술의 위상을 높이고 중국과의 문화교류를 개시하였다. 이를 계기로 성남시와 중국 심양 자매도시 간의 문화교류는 매년 심양 「한국 주간」에 성남예술단이 출국 공연하고 있으며, 업무추진을 위한 성남예총 심양 연락사무소(소장 : 손성종)를 개설하고 주중, 한국총영사관, 매가마트 문화관 등에 서예, 문인화, 사진 전시도 개최하는 등 자매도시 간의 문화예술 교류를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진정고 심양시장과 성남예총 민간 문화교류 협약-2001.8.16. 중국심양시청사에서                *확대사진-클릭

                     

                                  심양시 진정고 시장과 김성태 성남예총 회장이 성남, 심양간 민간문화교류협약 후 선물을 교환하고 있다.-2001.8.16. 심양시청에서...

 

          

                   *  중국요녕성예술제 초청공연한 성남예총이 구성한 '성남예술단' 첫 해외공연(2001.9.30~10.3. 심양중앙극장.

 

동년 10월 20일 故 박태현(동요 작곡가)이 성남예총의 상신으로 문화훈장(은장)을 추서하고 11월 20일 훈장 추서 기념 「동요열린음악회」를 「분당맑은노래친구들」(대표 : 윤금선) 주최로 개최하는 등 작고 예술인 추모사업으로 제5회 「박태현음악제」와 제8회 「정금란무용제」를 매년 개최하여 예술 정신을 기리고 있다.

                                     좌: 김성태(성남예총 회장).유족(자 박계성.사위 우창훈) 김병량 시장이 박태현옹 문화훈장 추서후 기념촬영(성남시장실 

 

 박태현음악제

3.1절노래 헌가식 및 박태현묘소참배 - 매년3.1 남서울공원묘원

생전의  정금란과 성남무용1세대 문하들

성남예총 창립 축하연에서 정금란(성남무용지부장/ 성예총 창립발기인)

 

2001년 성남 디자인 도시 원년의 해에 예총 회원 단체 「도비지원사업」을 10월 12~14일 집중적으로 개최하면서 「팔도민속한마당축제」 문화행사를 총괄 주도하는 등 10월 14일 「KBS국악한마당」을 유치하여 방영기 경기민요단, 성남 무용단(단장 : 김종해)과 판소리 명창 조상현, 선소리 산타령 기능 보유자 황영주, 회심곡의 김영임 등 중견 국악인들과의 합동 공연을 전국 녹화 방영케 하여 성남 예술의 활동을 크게 부각시켰으며,창작무용제, 《성남 문학》, 《성남 예술》, 학생미술공모전, 모란민속 5일장 축제 등 예총의 연례 사업들이 관계 회원 예술단체 주관으로 활발하게 전개된 한 해였다.

2002년 1월 25일 「신년음악회」를 시작으로 2월 5일 《성남 예술》 제8집 출간, 2월 7일 중국 연변 「동방예술학교」 가무단(단장 : 신정숙) 초청 공연을 청소년 수련관에서 개최하고 7월 5~9일 중국 심양시가 선포한 제1회 「한국주간」에 성남 예술단 50여명이 초청되어 공연하는 등 자매 도시 간의 문화교류사업을 활발히 전개했다. 한편 제2회 「청계산철쭉제」를 성남예총이 시 예산 지원 보조사업으로 총괄 주최하면서 특별사업의 연례행사가 추가되었다.

동년 7월 13~17일에 개최된 제9회 「성남전국사진공모전」 금상과 12월 21일의 제17회 성남미술대전이 개칭된 「모란현대미술대전」 대상 수상자 부상을 각각 200만원에서 300만원으로 상향 조정하고 예산을 확보하여 집행하므로써 전시 분야의 위상을 높이기도 했다.

한편「성남예술상」 수상자와 「박태현음악상」수상자에 성남교차로(대표 : 유길수)에서 부상금 100만원을 각각 매년 후원하고 있어 예술인 사기 진작에 일조한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동년 10월 10일 제24차 전국 예총 지도자대회(온양 그랜드호텔)에서 성남예총 사무국장 김정진이 10년 장기 근속 표창을 한국예총(회장 : 이성림)으로 부터 수상하였다. 이즈음 전국을 강타한 태풍 「루사」 영향으로 수재가 발생하고 국민 고통 분담 차원에서 시 예산 집행이 취소되어 성남미협전과 성남사협의 작품전을 제외한  제17회 「성남문화예술제」를 개최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 해로 기록되었다.

2003년 1월 29일 《성남 예술》 제9집 출간을 끝으로 5대 회기 정례사업을 마무리한 김성태 지부장의 재임 기간은 3, 4, 5대로 11년이었다.

성남예총의 3, 4, 5대 회기는 문화 복지시대 구현과 삶의 질 향상이라는 사회적 공감대와 문화예술 정체성 확립을 위한 각종 지원제도, 성남예술인구 증가, 다변화된 문화 향수욕구증대 등 지역사회 여건을 십분 수용하고 체계화하여 성남예총의 발전에 기반을 마련하여 문학?국악?무용?연극?연예?음악?사진?미술?영화협회 등 9개 회원단체의 연례사업 정착과 지역사회 문화예술단체 활성화로 향토예술의 전반적인 발전의 구심력을 확보한 회기였다고 할 수 있겠다.

2003년 2월 8일, 대의원 총회에서 6대 지부장에 방영기(方榮基, 국악)가 피선되었으며, 대의원 이탈로 총회 당일 부지부장, 감사 등을 선출하지 못하고 두 차례의 임시총회를 치루는 등 진통을 겪기도 했다.

3월 29일 이취임식과 함께 6대 회기를 출범하였다. 이취임식에는 한국예총 이성림 회장, 이대엽 시장, 김상현 시의회 의장, 등이 참석하였다.

동년 4월 「새봄맞이축제(분당 중앙공원 특설무대)」와  제3회 청계산철쭉제, 청소년예술제 「심심타파」, 7월 17~21일 중국 심양 제2회 「한국주간」에 성남예술단(단장 : 방영기) 45명을 구성하여 출국 공연하였다. 심양 「서탑」공연에는 이대엽 시장과 김상현 시의회 의장 등이 관람하고 격려하였다. 동년 10월 10~14일, 제17회 성남문화예술제를 집행하였다.

                                                                

2007.1월 이영식(성남연협지부장)이 방영기(6대 회장)과의 경선에서 1표차로 피선, 제7대 성남예총회장에 취임하였다.

                

                                                   성남예총 연혁                                                      

 

1986.  2. 17.

창립 인준(초대 지부장 : 임홍규, 부지부장 : 리재범.조이수)

회원 단체(문학, 국악, 무용, 연예, 연극 5개 단체)

신흥1동 반공회관에 소재

1987. 10. 24.

한국 음악협회 성남시 지부 창립(6개 회원 단체)

1988.  4.  9.

한국 사진작가협회 성남시 지부 창립(7개 회원 단체)

1988. 10. 31.

한국 미술협회 성남시지부 회원 입회(8개 회원 단체)

1989.  2. 20.

제2대 지부장 : 임홍규 피선(부지부장 : 리재범.조이수)

1999.  6.  4.

임홍규 사임(조이수 대행, 1991. 2. 20일까지)

1991.  2. 21.

제2대 지부장 잔여 임기 보선 : 남궁원 피선(부지부장 : 김건중.오종창)

1991.  8. 20.

남궁원 사임(오종창 대행, 12. 13일까지)

1991. 12. 14.

제3대 지부장 : 김성태 추대(부지부장 : 이대교.남기중.조영육.

임기 3년)

1991. 12. 30.

신흥3동 3435(구, 농촌지도소 이전)

1994. 11. 26.

제4대 지부장 : 김성태 추대,연임 (임기 4년으로 한국예총 정관개정. 부지부장 : 이대교.이영식.박용준)

1996.  8. 27.

한국 영화인협회 성남시지부 창립(9개 회원 단체)

1996. 10. 30.

시민회관(2층)으로 이전(11. 8일 현판식)

1999.  1. 23.

제5대 지부장 : 김성태 피선(부지부장 : 이대교.이영식.박용준)

2003.  2.  8.

2007. 2.   1

제6대 지부장 : 방영기 피선(부지부장 :이영식.주익수)

제7대   "        이영식 피선 (부회장: 김순미. 이예지)


 

 

                                                                                          -글 : 성남시사 30년사 문화예술 '성남예총'편에서

                                                                                             * 참조 : 2007년 기록은 '첨가'      - 징소리 김성태-

 

 

좌 : 김성태. 방영기.(성남예총 6대 회장). 문금용(성남시 문화복지 국장) - 

           

                                                          

                                      성남예총 제5 ,6대 회장 이, 취임식-2003.3.29. 성남시민회관 소강당.                                                

                                               *    좌: 문금용(성남시문화복지국장).방영기(취임 회장).김성태(11년 재임 임기만료 퇴임).이대교(성예총 부회장)

 .                                                                                                         

이임사를 하고 있는 김성태 회장

축사하는 한국예총 이성림 회장.

축사 -이대엽 성남시장

축사-김상현 성남시의회 의장

격려사-고흥길 국회의원(국회문공휘 간사).

격려사-임태희 국회의원

격려사-허운나 국회의원

                                                                                                                                                                                                                                                               

                                                                                                              ------------    

                                                                          * 7대 이영식 회장 취임

                              

                                                              제7대 성남예총 회장 취임식후-2007.4.11. 성남시민회관

좌 :김정우(수정구주민자치협의회장).이경식(성남단군성조회장).하남예총회장.염창순(경기예총 수석부회장).김선임(성예총 이사).

이영식 (취임 성예총 회장). 김성태. 이광용(경기사협 회장). 이순림(무용가). 오종창(전 성남사협 지부장). 뒤:진봉진(영화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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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1977년 봄 권기흥의 발의로 각 예술 분야의 연합 성격으로 창립된 가칭 성남문화예술인총연합회가 성남예총이란 명칭으로 활동하였다. 회장 권기흥, 부회장 이대엽, 박성준, 이재범, 조윤제 등이 참여한 가칭 성남예총은 제1회 성남명사취미전, 거북이마라톤 등의 행사를 개최하였으나 지역 사회에 가시화되지 못하고 친목 상태로만 유지되다가 1985년 10월 당시 김각현 성남시장의 독려로 권기흥이 앞장서 정식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성남지회 창립을 위한 추진 모임을 주선하게 되었고 이 단체는 자동 해체되었다.

창립을 위한 준비 모임 과정에서 주도권 갈등으로 마찰을 빚기도 했다. 창립 대의원 총회에서 임홍규가 초대 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나 한국미술협회 성남지회가 참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임홍규의 한국미술협회 성남지회 회원 자격을 제명하는 등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에 이의를 제기하여 인준이 보류되는 진통을 겪기도 했다. 1985년 12월 한국미술협회 성남지회를 제외한 한국문인협회 성남지회, 한국국악협회 성남지회, 한국무용협회 성남지회, 한국연극협회 성남지회, 한국연예협회 성남지회 등 5개 단체가 대의원 총회에서 한국국악협회 성남지회 이사로 소속되어 있던 임홍규를 지회장, 이재범, 조이수를 부지회장으로 선출하였다. 1986년 2월 17일,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의 창립 인준을 받았으며, 동년 3월 20일 성남 최초의 시가 퍼레이드를 비롯하여 국악, 무용, 연극, 연예 축하 공연과 미술 작품전 등 다양한 행사로 창립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성남지회는 1986년 창립 후 1987년 10월 24일, 한국음악협회 성남지회, 1988년 1월 23일 한국사진작가협회 성남지회, 1988년 10월 31일, 성남미술협회 성남지회, 1997년 한국영화인협회 성남지회가 가입하여 현재 9개 단체가 가입되어 활동하고 있다.

임홍규는 초대 지회장으로 성남종합예술제의 연례화, 성남미술대전 제정, 성남예술상 제정 등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성남지회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기관 단체장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를 운영하는 등 성남 문화 예술 풍토 조성에 기여하였다. 1989년 2월 20일, 2대 지회장에 연임되었으나 1990년 6월 4일, 임기 중 돌연 사임하여 부지장인 조이수가 지회장 직무대행으로 1991년 1월까지 대행 체제를 유지하였다. 1991년 2월 21일, 남궁원이 2대 잔여 임기 지회장에 보선되어 회보 발행, 까치골 후원회 구성, 예술인 야유회 등을 개최하면서 대행 체제의 공백기를 정비하던 중 지방자치 최초를 실시된 경기도 교육위원 출마로 동년 8월 20일, 임기를 맡은지 6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이로 인해 부지회장이던 오종창이 지회장 직무대행을 하게 되었다. 1991년 12월 14일, 김성태가 제3대 지회장에 선임되어 1992년 1월 15일 취임식을 가지면서 3대 회기가 출범하였으며, 1994년 11월 26일 제4대 지회장에 연임되었으며,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정관 개정에 따라 임기가 3년에서 4년으로 변경되었다. 김성태는 3, 4대에 이어 1999년 1월 23일 제5대 지회장에 피선되었다. 2003년 2월 8일, 대의원 총회에서 한국국악협회 성남지회 소속의 방영기가 지회장에 선출되었으며, 대의원 이탈로 총회 당일 부지회장, 감사 등을 선출하지 못하고 두 차례의 임시 총회를 치루는 등 진통을 겪기도 했으며, 동년 3월 29일 지회장 이취임식과 함께 6대 회기가 출범하였다. 2007년 2월 10일 이영식이 지회장에 선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주요사업과 업무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성남지회의 주요 사업은 먼저 성남 지역 문화 예술인들의 창작 활성화와 더불어 시민들에게 문화 예술을 접하고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각종 축제, 경연대회, 전시회 등 지방 예술 문화 진흥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지역 문화 예술인 발굴 및 육성을 위한 청소년 예술 사업으로 각종 청소년 경연대회 및 전시회 등의 행사를 하고 있으며, 성남 지역 예술인과 예술 단체들의 활동을 홍보하기 위해 『성남예술』 발간, 성남 예술 정보 자료실 운영 등 예술 홍보 사업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역 예술인들의 복지 증진과 친목 도모를 위한 각종 예술상 시상 및 성남 예술의 송년의 밤 등 예술인 복지 친목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지역 어르신을 비롯한 소외계층을 위한 예술인 봉사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성남지회의 숙원 사업으로는 성남예총회관 건립, 성남 시민예술대학 운영, 예술인 전용 아파트 빌라 건립, 예술인 장학기금 조성, 성남 문예진흥 발전기금 조성, 성남예술문화연구소 개소, 자매결연 국가와 문화예술 교륙, 성남예총 공연단 창단, 성남 기업메세나 협의회 구성 등이 있다.

활동사항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성남지회는 지역 예술 문화 진흥을 위한 연례 사업으로 1986년부터 성남문화예술축제와 성남미술대전, 성남시민의 날 경축행사, 1990년부터 전국연극제 경기예선대회참가, 1991년부터 한여름밤의 축제, 1992년부터 새봄맞이축제, 1994년부터 성남사진대전, 성남전국사진공모전, 1997년부터 동호인 문화예술 시창작발표회, 한가위 국악큰잔치, 1998년부터 성남 대합창 페스티벌, 연극합동공연, 1999년부터 공원별테마예술제와 예술순회공연, 공원별 테마 예술축제, 근로자를 위한 전통예술공연, 2008년부터 찾아가는 토요무대로 미니콘서트 등을 개최하고 있다.

또한 청소년을 위한 예술축제로 1986년부터 성남학생무용경연대회, 성남학생국악경창경연대회, 성남청소년 대중연예예술경연대회, 성남고교연극제 등을 개최하였으며, 1994년부터 성남학생미술공모전, 1995년부터 성남청소년예술제와 성남학생음악경연대회를 개최하였다.

예술홍보사업으로 1992년부터 성남예술문화게시대운영, 성남예술정보자료실운영, 성남문화캠페인운동전개, 성남사랑, 예술사랑 운동전개 등의 사업을 하였으며, 1994년부터 성남예술지발간, 1997년부터 성남문화예술 홍보위원회운영 등을 하고 있다. 그리고 예술인 복지 친목사업으로 1987년부터 성남예술대상시상식, 1992년부터 성남예술인 송년의 밤, 성남예술인 체육대회, 성남친교의 밤, 1995년부터 성남예술인대회 등을 개최한다. 예술인 봉사사업으로는 군부대, 경로당 등 위문공연과 시민위안공연, 거리질서, 자연보호, 환경보존캠페인, 불우이웃돕기 자선공연 등을 하고 있다.

현황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성남지회는 문예진흥법 및 지방제정법에 의하여 정액 보조단체로 2009년 현재 한국문인협회 성남지회, 한국국악협회 성남시지회, 한국무용협회 성남지회, 한국연예협회 성남지회, 한국연극협회 성남지회, 한국음악협회 성남지회, 한국사진작가협회 성남지회, 한국미술협회 성남지회, 한국영화인협회 성남지회 등 9개가 회원 단체로 등록되어 있으며, 2007년 2월 10일 선출된 이영식 회장과 김순미, 이예지 등 부지회장 2명, 자문위원회, 예술진흥회, 문화예술홍보위원회, 사무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참고문헌

  • 『성남시사』(성남시사편찬위원회, 2004)
  •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 성남지회(http://www.cas.or.kr)

출처

제공처 정보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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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성남지회 [韓國藝術文化團體總聯合會城南支會]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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