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 머릿속엔 완벽한 편집본이 이미 들어 있다. 찍고 편집하는 게 아니라, 머릿속 편집본대로 찍는다. 집을 지으면서 '못 한 포대 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못이 53개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급이 다른 천재다." 배우 크리스 에번스가 봉준호와 '설국열차'를 찍고 나서 한 말이다.
올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과 일해본 사람들은 "남과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쓰고 찍고 편집해 영화를 완성한다"고 입을 모은다. 봉 감독이 영화 '플란다스의 개'에서 '기생충'에 이르기까지 색채 강렬한 작가주의 영화를 만들면서도, 흥행도 놓치지 않는 작품을 연달아 내놓는 것도 이런 남다름 덕분이란 얘기다.
◇급이 다른 이상한 천재
"네, 전 장르 영화를 찍습니다. 다만 좀 이상하게 만들죠. 정해진 규칙을 잘 따르지 않고, 따르지 않는 규칙 틈바구니로 제가 생각하는 사회문제 같은 걸 끼워 넣죠." 23일(현지 시각) 칸영화제에서 열린 '기생충' 기자회견에서 봉준호는 말했다.
'이상하다'는 단어만큼 봉준호를 정의하는 말도 없다. 일단 작품 구상에만 몇 년씩 걸린다. '기생충'은 기본 골격과 캐릭터 구축에만 5년 넘게 걸렸다. "2013년 '설국열차' 후반 작업을 할 때 구상하기 시작했다. 계층 갈등을 수직 이미지로 나타내보고 싶었다. 빛도 안 드는 어둡고 습한 지하와 볕이 넘실대는 주택을 대비해서 보여주겠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다."
봉준호는 연출뿐 아니라 직접 각본을 쓰고 콘티를 그린다. 각본의 모든 장면을 그려 만화책처럼 만든 뒤 배우들에게 보여주고 "여기 서서 이렇게 움직이면 된다"는 식의 정보를 정확히 준다. '옥자'를 함께 찍은 영국 배우 릴리 콜린스는 "봉준호는 사랑스러운 괴짜 천재"라고 했다. '모든 디테일을 신경 쓴다'는 뜻의 별명 '봉테일'이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글과 그림에 능한 집안 내력이 봉준호 특유의 연출 방식을 낳았다는 말도 있다. 외할아버지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쓴 박태원(1909~1986)이다. 아버지 봉상균(작고)은 우리나라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로 한국디자인트렌드학회 이사장을 지냈다.
◇불안과 공포를 포착하는 눈
봉준호는 스스로를 "너무 소심해 사회생활도 제대로 못 할 것 같던 아이"였다고 했다. 이런 소심함이 집에 틀어박혀 TV 영화를 밤새 보며 감독의 꿈을 꾸는 소년으로 키웠다. 촬영장에선 '젠틀맨' 소리를 듣는다. '기생충'을 제작한 곽신애 바른손이앤에이 대표는 "촬영 현장에서 봉 감독이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세계적 촬영 감독 다리우스 콘지는 "대단한 설득력을 갖춘 이야기꾼인 동시에 독재자가 아닌 리더다. 군주로 치면 성군, 장수로 치면 덕장이며 지장"이라고 했다.
남들보다 유난히 사회 밑바닥에 깔린 불안과 공포를 포착하는 눈도 지녔다.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공부한 그는 벌이가 좋지 않은 조감독 시절엔 결혼식 비디오를 찍거나 사다리차 같은 제품 사용설명 비디오를 찍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때 사회 시스템이 모두를 구제할 수 없다는 사실에 눈떴고, 이런 문제의식을 녹인 것이 봉준호표 작품이다.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살인의 추억'은 550만, '괴물' 1000만, '마더' 300만, '설국열차'는 935만명을 불러모았다. '기생충'은 192국에 팔리면서
역대 한국 영화 판매 1위 기록을 세웠다.
출국 전 기자회견에서 봉준호는 "워낙 한국적 상황을 그린 영화라 해외 반응이 어떨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수상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선 "엄살 좀 부려본 것"이라고 했다. "부자와 가난한 자, 가족 이야기가 나오는데 당연히 보편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엄살을 먼저 떨어줘야 반전이 생기는 것 아닌가?(웃음)"
▲ '영원한 스타' 고 강신성일 발인60년대부터 한국영화 대표배우로 활약했던 ’영원한 스타’ 고 강신성일 한국영화협회 명예 이사장 발인이 6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영화인장으로 엄수되었다. 배우 안성기, 이덕화 등 영화인들이 운구에 참여하고 있다.ⓒ 권우성
▲ '영원한 스타' 고 강신성일 발인60년대부터 한국영화 대표배우로 활약했던 ’영원한 스타’ 고 강신성일 한국영화협회 명예 이사장 발인이 6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영화인장으로 엄수되었다. 부인 엄앵란, 아들 강석현 등 유가족과 영화인들이 고인의 운구를 지켜보고 있다.ⓒ 권우성
6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진행된 고 신성일의 발인식에서 유족과 배우 이덕화(오른쪽 줄 앞) 등이 운구 대열을 이뤄 고인의 영정을 뒤따르고 있다. 뉴시스
6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진행된 신성일의 발인식에서 부인 엄앵란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뉴시스
폐암 투병 끝에 81세를 일기로 별세한 ‘국민배우’ 신성일이 유족과 친지, 동료들의 배웅 속에 평온히 잠들었다.
6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신성일의 영결식이 엄수됐다. 배우 신영균 김형일, 이장호 감독,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 등 150여명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했다. 공동장례위원장인 안성기와 부위원장을 맡은 이덕화가 운구에 참여했다.
추모 영상 상영이 이어졌다. ‘맨발의 청춘’ ‘초우’ ‘안개’ ‘별들의 고향’ ‘길소뜸’ 등 고인의 대표작을 한데 엮었다. 사회를 맡은 배우 독고영재는 “고인은 한국영화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셨다. 그가 아니었으면 1960, 70년대 한국영화 중흥의 시대가 있었을까 싶다”고 애도했다.
공동장례위원장을 맡은 지상학 한국영화인총연합회 회장은 추도사에서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선배님 이름을 모르는 국민은 없는데 무슨 찬사가 더 필요하겠나”라며 “선배님처럼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군림한 대스타는 전에도 후에도 없을 것이다. 당신이 있어 행복했고 같은 시대에 살았다는 것이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오석근 영화진흥위원장은 “선생님은 60, 70년대를 관통하는 한국사회의 표상이었다. 이제는 사람들의 가슴속 가장 아름다운 별이 되셨다”면서 “오직 영화를 위해 살다 가신 그 진정과 열정을 결코 잊지 않겠다. 선생님을, 그리고 선생님이 사랑했던 영화를 치열하게 기억하겠다”고 추모했다.
끝으로 부인 엄앵란이 추모객들에게 담담한 어조로 인사했다. 그는 “가만히 앉아 (영정)사진을 보니 ‘참 당신도 늙고 나도 늙었네’ 하는 생각이 든다”며 “나는 울면서 보내고 싶지 않다. 울면 망자가 마음이 아파 걸음을 못 걷는다더라. 억지로 울음을 참고 있다. 이따 자정이 돼서야 이부자리에 누워 울 것 같다”고 했다.
이어 “그동안 (부부 사이에) 희로애락도 많았고, 엉망진창으로 살았다. 다시 태어나서 (남편과) 산다면 이제는 선녀같이 공경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런데 이미 때는 늦었다”면서 “여러분은 댁에 계신 부인들께 잘하시라”고 얘기했다.
고인은 생전 자택이 위치한 경북 영천 선영에 영면한다. 고인이 명예조직위원장을 맡았던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측이 마련한 추도식은 7일 오전 고인의 자택에서 열린다. 관계자는 “장례 이후 고인이 생전 구상하신 ‘신성일 기념관’ 설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나갈 계획”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