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鄭芝溶,1902~?)
충북 옥천 출생. 휘문고보 졸업. 일본 도지샤 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 졸업.
귀국후 휘문고보 영어 교사로 재직했으며 광복 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1950년에 한려수도를 여행중 전란을 맞아 북한군에 붙잡혀 행방 불명되었다.
동인지<요람>을 발간하면서 <향수>, <슬픈 인상화>,<풍랑몽> 등을 발표했다. [시문학]동인이었으며 섬세하고 감각적인 시어와 선명한 이미지를 구사하여, 1930년대 시이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첫 작품인 <카페프란스>,<슬픈인상화>,<파충류동물> 등을 경도(유학생잡지)인 <학조>(1926)창간호에 발표했다. 첫 작품들은 다다이즘,미래파 계열의 경향을 보였으나, 곧 선명한 객관적.즉물적 이미지를 중시하는 이미지즘으로 전향했다. 현실인식,망국의식을 반영한 작품도 있고, 카톨릭 신앙을 나타낸 작품도 있으나, 이미지즘과 동양 고전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후기 시집인 <백록담>은 지성의 절제,토착어의 순화,선명하고 정확한 이미지 등을 바탕으로 한 이미지즘 경향의 작품집이다. 박목월,조지훈,박두진,박남수 등을 <문장>지를 통해 추천하였고, 이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시인이다. 시집에 <정지용시집>(1935),<백록담>(1941)등이 있다.
1. - 향수(鄕愁)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2.<카페 프란스>
옮겨다 심은 종려(棕櫚)나무 밑에 비뚜로 선 장명등(長明燈) 카페·프란스에 가자.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 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비쩍 마른 놈이 앞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먼트에 흐느끼는 불빛 카페·프란스에 가자.
이놈의 머리는 비뚜른 능금 또 한 놈의 심장은 벌레 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어간다. * "오오 패롤[鸚鵡] 서방! 굳 이브닝!"
"굳 이브닝!"(이 친구 어떠하시오?)
울금향(鬱金香) 아가씨는 이 밤에도 경사(更紗) 커튼 밑에서 조시는구료!
나는 자작(子爵)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大理石)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
오오, 이국종(異國種) 강아지야 내 발을 빨아다오. 내 발을 빨아다오. -----------------------------
3. - 춘설(春雪)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루 아침,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하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로워라.
옹송그리고 살아난 양이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 순 돋고 옴짓 아니기던 고기 입이 오물거리는,
꽃 피기 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춥고 싶어라. ---------------------------------------
4.<바다 2>
바다는 뿔뿔이 달아나려고 했다.
푸른 도마뱀 떼같이 재재발렀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았다.
흰 발톱에 찢긴 산호(珊瑚)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가까스로 몰아다 부치고 변죽을 둘러 손질하여 물기를 씻었다.
이 애쓴 해도(海圖)에 손을 씻고 떼었다.
찰찰 넘치도록 돌돌 구르도록
휘동그란히 받쳐 들었다! 지구(地球)는 연(蓮)잎인 양 오므라들고 …… 펴고 ……. -------------------------------------------
5. -유리창(琉璃窓) 1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
6.<비>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섰거니하여 꼬리 치날리어 세우고,
종종 다리 까칠한 산새 걸음걸이.
여울 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돋는 비ㅅ낯
붉은 잎 잎 소란히 밟고 간다. --------------------------------
7. -인동차(忍冬茶)
노주인(老主人)의 장벽(腸壁)에 무시(無時)로 인동(忍冬) 삼긴 물이 나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 피어 붉고,
구석에 그늘 지어 무가 순 돋아 파릇하고,
흙 냄새 훈훈히 김도 사리다가 바깥 풍설(風雪) 소리에 잠착하다.
산중(山中)에 책력(冊曆)도 없이 삼동(三冬)이 하이얗다. ----------------------------
8. -별-
누워서 보는 별 하나는 진정 멀ㅡ고나
아스름 다치랴는 눈초리와 금(金)실로 잇은 듯 가깝기도 하고,
잠 살포시 깨인 한밤엔 창유리에 붙어서 엿보노나.
불현듯, 솟아나듯 불리울 듯, 맞아들일 듯,
문득, 영혼 안에 외로운 불이 바람처럼 이는 회환에 피어오른다
흰 자리옷 채로 일어나 가슴 우는 손을 여미다
*
백록담
절정에 가까울수록 뻐꾹채꽃 키가 점점 소모된다. 한 마루 오르면 허리가 스러지고 다시 한 마루 우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중에는 얼굴만 갸옷 내다본다. 화문(花紋)처럼 판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꾹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팔월 한철엔 흩어진 星辰처럼 난만하다. 산 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아도 뻐꾹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암고란(巖古蘭), 환약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아 일어섰다.
백화(白樺) 옆에서 백화가 촉루(髑髏)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백화처럼 휠 것이 숭없지 않다.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퉁이, 도체비꽃이 낮에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바야흐로 해발 육천 척 우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 여기고 산다. 말이 말끼리 소가 소끼리 , 망아지가 어미소를 송아지가 어미말을 따르다가 이내 헤여진다.
첫새끼를 낳노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 났다. 얼결에 산길 백 리를 돌아 서귀포로 달아났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윈 송아지는 움메 - 움메- 울었다. 말을 보고도 등산객을 보고도 마구 매어 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모색(毛色)이 다른 어미한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
풍란이 풍기는 향기, 꾀꼬리 서로 부르는 소리, 제주 휘파람새 휘파람 부는 소리, 돌에 물이 따로 구르는 소리, 먼데서 바다가 구길 때 솨 - 솨 - 솔소리 , 물푸레 동백 떡갈나무 속에서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다시 칠넌줄 기어간 흰 돌바기 고부랑길로 나섰다. 문득 마주친 아롱점말이 피하지 않는다.
고비 고사리 더덕순 도라지꽃 취 삿갓나물 대풀 석용 별과 같은 방울을 달은 고산식물을 새기며 취하며 자며 한다. 백록담 조촐한 물을 그리어 산맥 우에서 짓는 행렬이 구름보다 장엄하다. 소나기 놋낫 맞으며 무지개에 말리우며 궁둥이에 꽃물 익여 붙인 채로 살이 붙는다.
가재도 기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겨온 실구름 일말에도 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굴에 한나절 포긴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조차 잊었더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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