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절의 향기-삼학사(三學士) 윤집(尹集)
2005.12.21~12.25일 까지 성남타임주 주관으로 삼학사추모제와 삼학사중수비가 보관된 전시장, 삼학사재중수비가 건립된 중국심양의 발해대학을 다녀온바 있다.
나라사랑의 충절이 더욱 간절한 오늘, 삼학사의 역사적행적을 요약이나마 되돌아 보는것도 현대인의 애국관에 새로운 성찰의 계기가 될것이다.


윤집[尹集]
1606(선조 39)~1637(인조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병자호란 때 청과의 화의를 반대한 3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성백(成伯), 호는 임계(林溪)·고산(高山). 아버지는 현감 형갑(衡甲)이며, 형이 남양부사 계(棨)이다. 어려서 아버지가 죽자 형과 함께 공부했다. 1631년(인조 9)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설서·이조정랑·부교리 등을 지냈다. 1636년 교리로 있을 때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선을 속국시하며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하자 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 등과 함께 사신을 죽이자고 주장했으며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던 최명길(崔鳴吉)·이민구(李敏求) 등을 탄핵했다. 그러나 이듬해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 항복을 하며 화의가 성립되고, 청나라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주장하자 오달제와 함께 소를 올려 스스로 척화론자로 나서 봉림대군(鳳林大君)·오달제·홍익한 등과 함께 청나라에 잡혀갔다. 1637년 4월 심양(瀋陽)에 도착한 뒤 고문과 회유에 굴하지 않고 항변하다 심양성 서문(西門) 밖에서 오달제와 함께 처형당했다. 광주(廣州) 절현사(節顯祠), 강화 충렬사(忠烈祠), 고령 운천서원(雲川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묘표

소재지:충남 부여군 내산면 온해리

윤집은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남원, 호는 임계(林溪),현감인 형갑(衡甲)의 아들이며, 남양부사로 근왕병을 이끌고 참전하다 전사한 윤계(尹棨)의 아우이다.
최명길(崔鳴吉)이 화의(和議)를 주장하자 "화의를 주장하는 자는 목을 베라"고 상소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다가 척화파로 지목되어 심양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선생의 부인인 안동 김씨는 당시 척화파(斥和派)의 거두인 예조판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조카딸이다.



신도비

소재지:충남 부여군 내산면 온해리
묘소 바로 아래에 1975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고 옆 마을에 지금도 후손이 살고 있다.
윤집은 청나라로 압송되어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심문하면서 척화(斥和)를 제창한 사람을 대라고 하자,"죽는 것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다. 내가 내 머리를 이고 왔으니 잘라야 할 것이면 즉시 자를 일이요 다른 말을 말라"고 하였다.
뒷날 효종 임금은 윤집의 가문에 대하여 "할아버지 윤섬,큰손자 윤계, 작은 손자 윤집은 삼절(三節)이니 참으로 귀하구나"하고 충절을 기렸다.



윤집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김성태/경기예총 수석부회장,daum.net자료참조. 요약정리

기사등록 : 2006-01-07 08:12:27
                
충절의 향기-삼학사( 三學士)홍익한(洪翼漢)
2005.12.21~12.25일 까지 성남타임주 주관으로 삼학사추모제와 삼학사중수비가 보관된 전시장, 삼학사재중수비가 건립된 중국심양의 발해대학을 다녀온바 있다.
나라사랑의 충절이 더욱 간절한 오늘, 삼학사의 역사적행적을 요약이나마 되돌아 보는것도 현대인의 애국관에 새로운 성찰의 계기가 될것이다.


洪翼漢
1586(선조 19)~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습( ). 자는 백승(伯升), 호는 화포(花浦)·운옹(雲翁). 병자호란 때 주전파(主戰派)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청나라로 끌려가서도 끝내 뜻을 굽히지 않다가 죽음을 당했다. 아버지는 진사 이성(以成)이며 어머니는 김림(金琳)의 딸이다. 큰아버지 대성(大成)에게 입양되었으며, 이정구(李廷龜)의 문인이다. 1624년(인조 2) 공주행재정시문과(公州行在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한 뒤 사서·장령 등을 역임했다. 1636년 청나라가 제호(帝號)를 쓰면서 사신을 보내 모욕적 조건을 제시하자, 상소를 올려 사신들을 즉각 처형할 것을 주장했다. 그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崔鳴吉)의 화의론(和議論)을 끝까지 반대했으며, 그의 아내와 아들·사위 등은 모두 난중에 전사하거나 자결했다. 다음해 화의가 성립되자 화친을 배척한 자들을 내놓으라는 청나라의 요구에 따라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과 함께 청나라 선양[瀋陽]으로 끌려갔다.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반청(反淸)의 자세로 버티다가 다른 2명의 학사와 함께 사형당했다. 광주 현절사(顯節祠), 강화 충렬사(忠烈祠), 홍산 창렬서원(彰烈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화포집 花浦集〉·〈북행록 北行錄〉·〈서정록 西征錄〉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묘표

서(書): 심사성(沈師聖)
연 대: 숙종15년(1689)
소재지: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

홍익한(1586~1637)의 본관은 남양,호는 화포(花浦), 진사 이성(以成)의 아들이고 이정구(李廷龜)의 문인이다. 삼학사의 한사람으로 청나라와의 화의를 배척하고 척화를 주장하여 윤집,오달제와 함께 체포되어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갔다. 언관(言官)으로서 대의(大義)를 밝히며 의연한 뜻을 끝까지 지키다 처형당하였다.
묘비 앞 들녘에는 미공군부대가 들어서 있어 예나 지금이나 점령군의 틈에서 대의와 굴욕이 교차하는 듯하여 감회가 비통하다. 비문은 외증손 심사성이 썼다.

묘갈
贈領議政諡忠正洪公墓碑銘
(증영의정시충정홍공묘비명)

전(篆):민진원(閔鎭遠)
찬(撰):송시열(宋時烈)
서(書):이의현(李宜顯)
소재지: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
묘소 앞 포의각(褒義閣) 안에 있는 비석으로 비문을 찬술한 송시열은 그의 저서 송자대전(宋子大全)의 삼학사전(三學士傳)에서 말하길,홍익한이 처형되자 함께 끌려간 소현세자가 명을 내려 비단에다 초혼(招魂)해서 본국으로 보내었는데, 아들 또한 청나라 군사에게 처형당하여 후사가 없으므로 양자인 응원(應元)이 선생의 옷과 신을 매장하고 부인 허씨를 합장하였다고 한다


수양산(首陽山) 나린 물이 이제(夷齊0의 원루(寃淚0이 되어
주야불식(晝夜不息)하고 여울여울 우는 뜻은
지금(只今)에 위국충신(爲國忠臣)을 못내 �어 하노라 -홍익한


김성태st3845@hanmail.net/경기예총수석부회장, daum.net자료참조 요약정리

      

 삼학사비(三學士碑)의 고찰(考察)-삼한산두(三韓山斗)의 역사현장

2005년12월 21일부터 25일까지 성남타임즈(발행인 고재혁)주관으로 중국심양의 발해대학에서 삼학사 추모제에 참석하였다. 이에 삼학사비에 대하여 정리하여 삼학사의 역사적 재 조명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삼한산두(三韓山斗)!라는 글귀는 삼학사 비두에 청태종이 새긴 말이다.
조선의 태산과 북두.
"태산같이 높고 북두칠성같이 빛나는 분"


삼학사비(三學士碑)

<동아일보> 1933년 5월 13일자에 수록된 "삼학사 비석" 관련보도.

인조 당년(仁祖 當年)의 삼학사(三學士)
봉천(奉天)에서 비석(碑石) 발견
청태종(淸太宗)에 굴복(屈服)않고 장열(壯烈)한 최후(最後)
충혼의백(忠魂毅魄)의 옛자취

지난 5일 봉천(奉天) 십간방 일중어강습소 소장 황육덕(黃肉德, 황윤덕의 오기)씨는 북시장(北市場) 보선사(保○寺) 문전에서 삼한산두(三韓山斗)라고 새긴 중동 부러진 비석 한 개를 파내었다. 이 비석은 용을 조각한 훌륭한 비석이나 바람과 비에 닳고 낡았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땅속에 묻혔던 관계로 그 조각면이 확실히 남아 있지 아니 하였다. 그러나 삼한산두의 넉자 만은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어 그 당시 사적을 역력히 말하고 있었다 한다. 이 비석인즉 인조(仁祖)의 충신열사 삼학사(三學士)의 유적이다.

지금으로부터 298년전 인조시에 청태종(淸太宗)이 조선과 친선을 맺고자 누차 조선에 사신을 보내었으나 명조(明朝)와의 관계로 이것을 듣지 아니하여 마침 태종은 대병을 거느리고 병자년(丙子年) 섯달에 왕성를 범하였다.

이때 인조께서는 신하와 종친을 데리시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피하시니 때의 형세는 그야말로 사직(社稷)의 흥망을 재촉하는 것 같았다. 형세가 이에 미치매 조정에는 화전양론이 대치되었는데 당시 김청음(金淸陰) 정동계(鄭桐溪) 등 중신과 홍익한(洪翼漢)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 등 삼학사가 화친은 항복을 말하는 것이라 하여 끝까지 반대하였다.

그러나 세 이미 불리하여 화친할 도리 이외에는 좌이대사하는 수밖에 없었으니 청병에게 당하는 백성의 욕은 나날이 심하여 갔으므로 하는 수 없이 청조와과 화친을 맺었다. 이 굴욕의 화친은 왕자 두 분과 화친을 반대하던 삼학사를 배도(陪都)(지금 봉천)로 보내고 말았으니 왕자 두 분은 현재 봉천교섭처(奉天交涉處)인 질관(質館)에 계시게 하고 삼학사는 옥에 넣었다. 그리고 삼학사를 백방으로 달래기도 하고 갖은 악형 하여 항복을 하라고 하였으나 결국 듣지 아니하여 참하여 버렸다.

이 삼학사의 장렬한 충절은 그 후 청조유사(淸朝遺事), 동화록(東華錄), 청사(淸史), 청사통속연의(淸史通俗演義), 배도잡기(陪都雜記) 등에 명기되어 역사로, 소설로, 연극으로 삼학사의 사적은 전하여왔다. 뿐 아니라 당시 청조에서는 삼학사의 절개를 경앙하고 또 자국민의 절의를 장려하기 위하여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은 절개라고 봉천 성서소사(城西小寺) 부근에 묘(廟)를 짓고 전기 삼한산두라고 새긴 석비를 세워 춘추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 삼학사의 비가 청조가 망하자 돌아보는 사람없이 20여년 동안을 땅속에 묻히어 있다가 우연히 조선인의 손으로 발굴되었는데 황씨는 봉천의 유지들과 의론하고 이 비석을 목하 황씨의 강습소로 옮기어 두었는데 앞으로 북시장 공원에 삼학사비를 다시 세워 오래, 오래 지사의 혼을 기념할 터이라는데, 현재 봉천총영사관 부영사 오두환(吳斗煥)씨와 관동군사령부의 윤상필(尹相弼) 대위가 이 삼학사 오달제, 윤집의 후손이라고 한다. 위 동아일보 보도외에도 동년5월12일자의 <매일십보>의 같은기사, 1934년6월3일 <조선중앙일보>에도 삼학사유적보존회 창립과 관련기사가 보도 되었다.


삼학사중수비(三學士重修碑)

1935년 병자호란 300돌을 기념하여 당시 항일운동의 거점도시였던 봉천(지금의 심양)에서 황인덕.김구경등이 중심되고 삼학사유적보존회와 조선동포 120여명이 모금하여
심양시 춘일공원에 삼학사중수비를 건립하고 삼학사의 절개와 민족혼을 지켜 조국독립을 염원하는 추모제를 올렸다. 이중에는 일본인도 있었다니 그들의 삼학사에 대한 역사관을 엿볼 수 있다.

<중수삼학사비기(重修三學士碑記)>

조선은 단군이 나라의 기틀을 세웠고 기자가 강역을 열었다. 풍속이 충효를 숭상하고 선비들은 인의에 도타우니, 예로부터 예의의 나라로 일컬어져 왔다. 300년전인 인조 14년 병자년 겨울 청태종이 조선을 침략했다. 남한산성의 형세가 위태롭자 조정에서는 강화를 청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이때 대간 홍익한. 교리 윤집. 수찬 오달제는 대의를 부르짖으며 화의를 배척하였다. 화의가 이루어자 삼학사는 척화의 수괴로 지목되어 심양에 잡혀갔다.

청 조정에서는 이들을 귀순시키고자 하여, 온갖 영예와 이익으로 회유하는 한편 엄혹한 형벌로 협박하였다. 허지만 세분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다음해 3월에 죽었다. 그 높은 절개와 큰 의리는 일월과 빛을 다투고 만고에 썩지 않을 것이다. 이에 나라에서는 남한산성에 현절사, 부여에는 창절사를 세웠고, 경상도 영천에는 장엄서원을 개창하여 그 정신을 기렸으니 향사가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다. 청조에서도 그 곧은 의리를 포장하여 심양성 서문밖에 사당을 건립하고 비석을 세워 그 위에 삼한산두(三韓山斗)를 새겼다. 삼한이란 조선을 가리키고, 산두란 그 절의가 태산북두처럼 빛난다는 뜻이다.

사당과 비석을 세운 전말이 청나라 사람이 쓴 일사(軼史, 일종의 야사)에 실려 있다.계유년 겨울 나는 심양에 머물면서 그 유적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하지만 세월이 오래되어 사당과 비석은 모두 사라졌다. 교외에서 옛일을 조상하는데 감개한 탄식을 이길수 없었다. 마을의고로에게 물어보니, 소서문 밖 세분이 순절한 곳에 작은 절이 있었는데, 조선의 세분을 모신 사당으로 전해진다고 하였다. 지금의 북시장(北市場) 보령사 (保靈寺)근처이다. 절문 앞 눈구덩이 속에서 비액(碑額)하나를 찾았는데, 글자를 새긴 흔적이 있었다. 흙을 씻어내고 보니 '삼한산두' 넉자가 찬연하니, 일사의 내용과 서로 딱 맞았다. 절의 주인과 상의하여 내가 사는 집으로 옮겨두고, 두루 비신을 찾았지만 찾지 못하여 오래도록 아쉬운 마음을 금치 못하였다. 이때 심양에 사는 여러 현자들이 그 사연을 영원히 하고자 하여' 삼학사유적보존'를 발기하였다. 각자 나누어 성금을 모아 새로 비신과 귀부를 조성하고 여기에 비액을 얹어 다시 세웠다. 이로써 충절의 기상은 위로 해와 별을 꿰뚫으니, 세상이 변하여 때로 숨겨지기도 하지만 결국 영원히 묻히게 하지 않으며, 사람들의 말없는 느낌은 귀신의 기호와 상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영원토록 보존되어 흙더미 속에 묻히지 않게 되기를 후세의 군자들에게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짓는다.

인조 병자년으로부터 300년이 지난 을해년 봄 3월에
창원 황윤덕이 삼가 짓고 경주 김구경이 삼가 쓰다.
(번역 이승수)

그러나 삼학사중수비를 세운 조선동포들의 염원은 1966년 중국의 문화혁명 소용돌이를 비켜가지 못하였다. 홍위병들이 이비를 강변에 내다 버렸고, 이후 어느 중국인의 집 주춧돌에 놓인것을 당시 랴오닝대 교수이자 중국과학자협회 부이사장인 천문갑(현 발해대학장)이 인민페 5천위안에 구입하여 발해대학에 갖다 놓았다고 한다.

역사와 현실은 항상 이데올로기의 관계선상에 있는 것인지, 삼학사의 유일한 현장 유물인 중수비는 어떤 연유인지 훼손되고 방치된체 한. 중 국제교류의 개화 시대에 이르기 까지 질곡의 역사를 지켜왔다.

삼학사재중수비(三學士再重修碑)

1997년 허창무. 신청등이 성남문화원 부원장으로 남한산성의 문화권역을 학술적으로 재 조명하고 '삼학사 모시요!'등 사업을 개시하였다. 한편,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사람들(남사모)의 모임이 결성되면서 본격적인 삼학사 정신선양의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경기도가 남한산성 행궁을 복원하고 산성복원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삼학사에 대한 성남 광주 문화권역의 연대가 이루어 진것도 역사되찾기의 맥락에서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광주문화원이 주관된 현절사의 삼학사 추모제가 언론의 관심으로 등장되었다.

2004년 허창무. 신청. 고재혁.서학선등이 주도하여 요녕발해대학교후원회(회장 허창무)를 결성하고 동년 12월 발해대학에서 첫번째 삼학사추모제를 고재혁 주도로 올렸다.

이를 계기로 방치되고 훼손된 삼학사중수비의 복원이 활발하게 논의되던중 계룡건설 장학재단(이사장 이인구)이 후원하여 2005년 7월 30일 드디어 요녕발해대학 교정에 삼학사 재중수비와 학사정을 세웠고 방치된 중수비도 발해대학내 보관 전시하게 되었다


삼학사재중수비는 중수비와 같이 용두 2m. 폭83cm.두께 26cm. 높이 390cm로 거북형상의 비대로 비두와 함께 학자들의 고증에 따랐다고 한다. 한편, 계룡건설장학재단은 요녕발해대학에 세운 똑같은 모조비를 동년 8월 31일 천안 독립기념관에도 건립하여 삼학사의 충정을 후대에 귀감토록 하였다.

후일의 사가들은 병자호란 당시 항복문서를 쓴 사람도, 이를 찢은 사람도 "열지자 충, 결지자 충"의 양시론(兩是論)을 펴고 있어 사관의 객관적 접근이 아쉬운 현대사회의 기류이다. 




삼학사추모제의 참가는 심양시의'한국주간'에 성남예술단장으로 수 차례 방문한 민간차원의 문화사절 사명에 또다른 한국인의 기상을 의식한데서 느낌이 깊다.

삼학사의 항쟁이 베어있는 역사의 현장인 남한산성 문화권에 하루빨리 삼한산두(三韓山斗)의 삼학사비가 세워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김성태 st3845@hanmail.net/경기예총 수석부회장

기사등록 : 2006-01-04 14:29:18

 

* (관련자료)

* 삼학사 추모제 회고 (2005년)

삼한산두(三韓山斗)의 삼학사(三學士) 재 중수비 - 2005. 12. 22. 중국심양 발해대학 교정에서 본인 촬영 

(조선의 태산과 북두-태산같이 높고 북두칠성같이 빛나는 분)

 

삼학사(윤집. 오달제. 홍익한) 재 중수비가 세워진 중국심양 발해대학 교정에서 -2005. 12. 22. 

'삼학사 추모제'를 위해 2005. 12. 21.~12. 25. 중국심양 발해대학 방문 중)

 

삼학사 추모제에 헌화하는 김성태(성남타임즈 편집인) -2005. 12. 22.

 

삼학사 추모제 준비과정을 지켜보는 참석자들.(좌에서5번째가 발해대학 문갑 학장) -2005. 12. 22. 중국 심양 발해대학 강당에서 

 

훼손되어 방치된 삼학사비를 보관하고 있는 발해대학 전시관에서 -2005. 12. 22.

좌 : 염창순. 고재혁. 김성태. 류수남. 신청.

 

 

 

 

 수양산에서 내린 물이 이제의 피눈물 되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여흘여흘 우는 뜻은,
이대도록 나라 위한 충절을 못내 슬퍼함이라.
주욕신사니 내 먼저 죽어져서,
혼백이 되어 고국에 돌아감이 나의 원이러니,
어허! 오랑캐의 티끌이 해를 가림을 차마 어이 보리요

                                                                     - 홍익한-

성남을 방문한 발해대학 천문갑 학장과 -2005. 12. 1. 분당에서

좌: 류수남. 허창무. 조윤제. 고재혁. 이혜심. 천문갑. 김성태.

 

삼학사 추모제 참석일행이 심양공항에서 심양조선족노년예술단원들의 환영 꽃다발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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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학사비 관련>

(성남뉴스넷 맹교수 사랑방 이야기 중 "독립기념관 가는 길" - 퍼옴

본디 삼학사비는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의 충절을 기리고 그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청태종(淸太宗)이 제단을 모으고 세운 비였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 파괴되고 민멸하였기 때문에 ‘삼한북두’라는 네 글자만 있는 비액(碑額)을 가지고 1935(丙子)년 3월에 요녕성 심양에 거주하는 한국동포들이 ‘삼학사유적보존회’를 결성하여 성금을 모아 비신(碑身)과 귀부(龜趺)를 갖추어 심양에 다시 세운 것이었다.


그 후 중국의 문화혁명기(1966∼1976)에 파손되었다가 훈허(渾河)에서 어느 농부가 비신만을 보관하고 있는 것을 천문갑(千文甲)교수가 요녕대학에 임시보관하다가 발해대학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는 터에 한국 성남시의 지원을 받아 허창무교수(발해대학후원회장) 전보삼교수 고재혁씨 김성태씨 신청씨 서학선씨 등이 협력하고, 2005년 계룡건설(계룡장학재단) 이인구(李麟求) 명예회장의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받아 원형대로 2기를 모조하여 하나는 발해대학 구내에 세우고 하나는 독립기념관 부지에 세운 것이었다. 따라서 이 비들은 재중수비(再重修碑)에 속하는 셈이다.


이인구회장은 2006년 발해대학 구내에 학사정(學士亭)을 준공하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으며, 현재 독립기념관 삼학사비 옆에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는 광개토대왕비도 2004년에 그가 세워 놓은 것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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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문학 발해대학 학장 사망이후 폐교된 발해대학 교정에 있는 삼학사 비(돌보는 이 없어 잡초만 무성)-인터넷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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