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공복

                         -정진규

  

 

거기 늘 있던 강물들이 비로소 흐르는 게 보인다 흐르니까 아득하다 춥다 오한이 든다

 

나보다 앞서 주섬주섬 길 떠날 채비를 하는 슬픈 내 역마살이 오슬오슬 소름으로 돋는다

 

찬 바람에 서걱이는 옥수숫대들, 휑하니 뚫린 밭고랑이 보이고 호미 한 자루 고꾸라져 있다

 

누가 던져두고 떠나버린 낚싯대 하나 홀로 잠겨 있는 방죽으로 간다 허리 꺾인 갈대들 물 속 맨발이 시리다

 

11월이 오고 있는 겨울 초입엔 배고픈 채로 나를 한참 견디는 슬픈 공복의 저녁이 오래 저문다

 

 

—『시안』(2009. 여름)

2009년 제2회 이상(李箱) 시문학상  수상작

 

 

시인 정진규 :

미양면 보체리. 1939년 안성 출생. 안성농업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껍질』(세계사), 『본색』(천년의 시작) 외 다수시집 출간.

 한국시인협회상, 현대시학 작품상, 월탄 문학상, 공초 문학상, 문화훈장 수훈, 불교문학상 등 수상. 한국시인협회 회장 역임(1998~2000). 2008년,

고희 기념 활판 시선집 『우리나라엔 풀밭이 많다』(十月) 출간. 현재 시 전문 월간지 『현대시학』주간. 

     

 

 

 

 
▲ 제14회 김삿갓 문화제(영월) 중  제7회 김삿갓 문학상 수상자인 정진규 시인의 시비 제막식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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