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것이 처음부터 대중에게 환영 받을 수 있는 시절은 드물었다. 인상파 화가들이 추구한 ‘실험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누구도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의 그림을 명작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 인상파 전시회가 열렸을 때 상황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당시 파리는 문화적 요구로 넘쳐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이끄는 세력은 나폴레옹 3세의 경제 부흥정책 덕택에 급격하게 부상한 중산계급이었다. 백화점 소유주들이나 상인들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귀족과 부르주아의 문화를 동경했고, 이른바 상류층의 문화를 자신들도 향유하고 싶어 했다. 이런 요구에 잘 부합한 예술가들이 바로 바르비종파 화가들이었다.
인상파는 배척받고 바르비종파는 환영받은 이유
물론 그림 자체만으로 놓고 본다면 바르비종파 화가들도 인상파 화가들 못지않게 혁신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바르비종파 화가들이 없었다면, 인상파 화가들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인상파 화가들은 배척을 받고 바르비종파 화가들은 환영을 받은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바르비종파 화가(코로, 밀레 등)들은 부르주아의 응접실에 걸려 있었고, 인상파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람객들에게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은 그리다 만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이 따위 그림들은 고급주택의 응접실보다도 선술집 벽에나 걸어놓으면 딱 맞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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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보면서 기분 전환을 기대했던 관람객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말 그대로 경악스러웠다. 세잔의 그림이 최악이었다면 드가의 그림도 만만치 않았다. 지금 우리가 보면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당시 분위기에서 발레리나나 세탁부는 음탕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였다. 도시생활에서도 하층에 속하는 이들이 발레리나나 세탁부였던 것이다. 19세기에 발레리나는 우아한 직업에 속했다기보다 ‘쇼걸’에 가까운 존재였다. 대조적으로 세탁부도 고상한 이미지와 한참 거리가 먼 존재였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런 그림을 응접실에 걸어놓고 손님을 맞이할 부르주아가 어디 있겠는가? 바르비종파 화가들도 귀족이나 부르주아보다도 농부와 전원풍경을 주로 그렸지만, 인상파 화가들만큼 생생하게 일상생활 자체를 그렸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바르비종파 화가들의 그림은 급격하게 진행되었던 파리의 도시화에 힘입어 잃어버린 전원풍경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드가의 [발레 수업]은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에 그림을 좀 안다는 관람객들에게 파격적인 시선을 선사하는 작품이기도 했다. 단순하게 파격적인 소재 때문에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닌 것이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거친 마감은 말할 것도 없고 드가 특유의 구도가 편안한 균형감에 젖어 있는 관람객의 시선을 뒤흔들어 놓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드가는 다른 전시 참가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부댕과 브라크몽의 그림을 함께 전시하도록 기획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면 자신의 그림으로 인해 발생할 분란을 충분히 예상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드가는 당시 미술계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파리에서 발레리나는 ‘쇼걸’에 가까운 존재였다
관람객들은 드가를 비롯해서 인상파 화가들을 사기꾼이라고 비난하면서 조롱했다. 그림 같지도 않은 것을 그림이라고 그려놓고 전시회를 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나 지식인에 대한 대중의 혐오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이들은 화가들의 이름까지도 괴상하다고 트집을 잡았다. 모리조나 세잔 같은 이름이 우습다는 것이었다. 그림을 이해할 수 없으니, 사소한 것을 가지고 인신공격이라도 가하고 싶었던 것일까? 여기에서 한 술 더 떠서 어떤 관람객은 화를 내면서 환불을 요구하기도 했다. | |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지만, 그때 그 시절 관람객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본다면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요즘처럼 공교육제도가 발달해서 미술에 대한 기초 지식을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예술을 일상생활을 위한 기분전환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상황은 더 나빴을 것이다. 마네의 옹호자였던 에밀 졸라도 전시회를 방문하긴 했지만 구체적인 논평을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노력이 실패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면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미학운동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보수적인 언론들은 이들의 전시회를 완전히 무시했지만, 좌파 신문들은 비교적 자세하게 보도를 했다. 특히 그 중에서 <파리 저널>이라는 신문은 모네를 극찬했다.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호평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결과적으로 인상파의 이름을 소개하고 널리 알려준 비평이 없지 않아 있었다. 비평가 카스탕게리 같은 이는 공식적이고 아카데믹한 그림을 거부하는 새로운 화가들의 작품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소식을 전했고, 이런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논평에 힘입어 차츰 인상파 화가들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화가들로 성장시킨 장본인은 뒤랑-루엘이라는 집요하고 걸출한 화상이었다.
언제든 역사의 굽이마다 시대의 감수성을 남달리 파악한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이들은 새로운 것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알아보는 기막힌 감각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시대를 함께 만들어가는 뛰어난 비평가와 상인의 역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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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택광 / 문화비평가, 경희대 영미문화과 교수
- 부산에서 자랐다.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문화연구에 흥미를 느끼고 영국으로 건너가 워릭대학교에서 철학석사학위를, 셰필드대학교에서 문화이론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21>에 글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화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시각예술과 대중문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정치사회문제를 해명하는 작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영미문화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