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은 조선후기 경기도와 서울을 중심으로 등장한 우리나라 유학儒學의 새로운 학풍이다. 조선후기에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세계사의 전환과정에서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으로 국가기능이 마비되고 국토가 황폐화되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조선사회에서는 여러 가지의 개혁을 진행하여 농업생산력이 회복하는 한편, 새로운 상업이 발달하였다. 하지만 급박하게 전개되는 시대 상황에도 불구하고, 학문은 여전히 농민들의 현실생활과는 동떨어진 사장학詞章學이 아니면 주자학적인 성리학性理學이나 형식적인 예학禮學 속에서 잠자고 있었다. 이러한 학풍을 반성하고 국가의 총체적 개혁과 대외개방을 지향하려는 새로운 학풍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곧 실학實學이다. 실학은 ‘궁경치용窮經致用’ 즉 “고대의 유교 경전經典을 궁구窮究해서 국가의 총체적 개혁에 이바지하는 것”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물론 실용實用을 중시하는 이러한 학풍은 조선후기의 실학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고 자기시대의 요청에 올바로 부응하려는 학문이라면 어느 시대에나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조선후기의 실학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개혁과 개방이라는 시대 요청에 대한 철저한 인식입니다. 조선후기는 중세적인 어두움 속에서도 서양의 문물이 조금씩 들어오고, 상품경제가 활발히 전개되는 가운데 개혁이 절실히 요구되던 시대다. 여기에서 실학자들은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라는 낡은 시대의 자폐적自閉的 정신상황을 반성하는 한편, 국가의 총체적 개혁을 도모하는 것을 학문적인 사명으로 삼았다.
둘째, 고대의 유교 경전에 관한 근본적인 탐구입니다. 국가의 총체적인 개혁이라는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형이상학적인 성리학이나 양명학의 심학心學 등 형이상학을 가지고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인간의 본원적인 상태를 기반으로 성립하였다고 생각되는 고대의 유교 경전에 관한 연구로 돌아가고자 했다. 이러한 실학의 학문적 자세는, 이제 조선의 유학도 후대의 주석註釋에 의한 고전 탐구에서 벗어나 유교 경전에 관한 직접적인 연구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자신감의 표출이기도 했다.
셋째, 이 같은 시대인식과 유교 경전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시대의 전개를 위한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개혁의 궁극적 목표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국가체제의 확립을 위한 각종 제도의 개혁, 상공업의 발달을 촉진하기 위한 상업의 진흥과 기술개발 및 외국으로부터 새로운 문명을 수입하여 낡은 풍속을 개조하기 위한 개국통상 등에 관한 방안들을 제시하였다.
결국 실학은 조선후기의 새로운 시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서양문물을 참조함과 동시에 고대 유교 경전의 재해석을 바탕으로 개혁방향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탄생하였다. 이러한 실학은 14세기 서양의 문예부흥과 맞먹는다고 할 수 있다. 서양의 문예부흥이 자기시대 문제해결의 길을 찾기 위하여 그리스나 로마의 고전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이었다면, 실학도 자기시대 문제해결의 길을 찾기 위하여 중국의 고전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이었다. - ( 실학박물관 홈 참조)
정약용
본관 나주(羅州). 자 미용(美鏞)·송보(頌甫). 초자 귀농(歸農). 호 다산(茶山)·삼미(三眉)·여유당(與猶堂)·사암(俟菴)·자하도인(紫霞道人)·탁옹(籜翁)·태수(苔叟)·문암일인(門巖逸人)·철마산초(鐵馬山樵). 가톨릭 세례명 안드레아. 시호 문도(文度). 광주(廣州)(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출생이다.
1776년(정조 즉위) 남인 시파가 등용될 때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가환(李家煥) 및 이승훈(李昇薰)을 통해 이익(李瀷)의 유고를 얻어보고 그 학문에 감동되었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經義進土)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고, 1784년 이벽(李蘗)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功西派)의 탄핵을 받고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持平)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徐龍輔)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周文謨)사건에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副司直)을 맡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17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장기(長鬐)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다.
그 곳 다산(茶山) 기슭에 있는 윤박(尹博)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柳馨遠)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朴趾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836년 2월 22일 , 75세를 일기로 고향 마현에서 생을 마감했다. 1910년(순종 4) 정2품 규장각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시호를 문도로 하사 받았다. 19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馬峴) 묘전(墓前)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마과회통(麻科會通)》 《모시강의(毛詩講義)》 《매씨서평(梅氏書平)》 《상서고훈(尙書古訓)》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상례사전(喪禮四箋)》 《사례가식(四禮家式)》 《악서고존(樂書孤存)》 《주역심전(周易心箋)》 《역학제언(易學諸言)》 《춘추고징(春秋考徵)》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맹자요의(孟子要義)》 등이 실려 있다. -(daum 지식 홈 참조하여 첨가정리-징소리 김성태 )
다산 묘역 동산
부인 풍산 홍씨와 나란히 합장된 다산 묘
다산 정약용 생가 '여유당' (오른쪽 동산이 다산 묘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