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산두(三韓山斗)의 역사현장 - 삼학사비(三學士碑)의 고찰(考察)

2005년12월 21일부터 25일까지 성남타임즈(발행인 고재혁)주관으로 중국심양의 발해대학에서 삼학사 추모제에 참석하였다. 이에 삼학사비에 대하여 정리하여 삼학사의 역사적 재 조명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삼한산두(三韓山斗)!라는 글귀는 삼학사 비두에 청태종이 새긴 말이다.
조선의 태산과 북두.
"태산같이 높고 북두칠성같이 빛나는 분"


삼학사비(三學士碑)

<동아일보> 1933년 5월 13일자에 수록된 "삼학사 비석" 관련보도.

인조 당년(仁祖 當年)의 삼학사(三學士)
봉천(奉天)에서 비석(碑石) 발견
청태종(淸太宗)에 굴복(屈服)않고 장열(壯烈)한 최후(最後)
충혼의백(忠魂毅魄)의 옛자취

지난 5일 봉천(奉天) 십간방 일중어강습소 소장 황육덕(黃肉德, 황윤덕의 오기)씨는 북시장(北市場) 보선사(保○寺) 문전에서 삼한산두(三韓山斗)라고 새긴 중동 부러진 비석 한 개를 파내었다. 이 비석은 용을 조각한 훌륭한 비석이나 바람과 비에 닳고 낡았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땅속에 묻혔던 관계로 그 조각면이 확실히 남아 있지 아니 하였다. 그러나 삼한산두의 넉자 만은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어 그 당시 사적을 역력히 말하고 있었다 한다. 이 비석인즉 인조(仁祖)의 충신열사 삼학사(三學士)의 유적이다.

지금으로부터 298년전 인조시에 청태종(淸太宗)이 조선과 친선을 맺고자 누차 조선에 사신을 보내었으나 명조(明朝)와의 관계로 이것을 듣지 아니하여 마침 태종은 대병을 거느리고 병자년(丙子年) 섯달에 왕성를 범하였다.

이때 인조께서는 신하와 종친을 데리시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피하시니 때의 형세는 그야말로 사직(社稷)의 흥망을 재촉하는 것 같았다. 형세가 이에 미치매 조정에는 화전양론이 대치되었는데 당시 김청음(金淸陰) 정동계(鄭桐溪) 등 중신과 홍익한(洪翼漢)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 등 삼학사가 화친은 항복을 말하는 것이라 하여 끝까지 반대하였다.

그러나 세 이미 불리하여 화친할 도리 이외에는 좌이대사하는 수밖에 없었으니 청병에게 당하는 백성의 욕은 나날이 심하여 갔으므로 하는 수 없이 청조와과 화친을 맺었다. 이 굴욕의 화친은 왕자 두 분과 화친을 반대하던 삼학사를 배도(陪都)(지금 봉천)로 보내고 말았으니 왕자 두 분은 현재 봉천교섭처(奉天交涉處)인 질관(質館)에 계시게 하고 삼학사는 옥에 넣었다. 그리고 삼학사를 백방으로 달래기도 하고 갖은 악형 하여 항복을 하라고 하였으나 결국 듣지 아니하여 참하여 버렸다.

이 삼학사의 장렬한 충절은 그 후 청조유사(淸朝遺事), 동화록(東華錄), 청사(淸史), 청사통속연의(淸史通俗演義), 배도잡기(陪都雜記) 등에 명기되어 역사로, 소설로, 연극으로 삼학사의 사적은 전하여왔다. 뿐 아니라 당시 청조에서는 삼학사의 절개를 경앙하고 또 자국민의 절의를 장려하기 위하여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은 절개라고 봉천 성서소사(城西小寺) 부근에 묘(廟)를 짓고 전기 삼한산두라고 새긴 석비를 세워 춘추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 삼학사의 비가 청조가 망하자 돌아보는 사람없이 20여년 동안을 땅속에 묻히어 있다가 우연히 조선인의 손으로 발굴되었는데 황씨는 봉천의 유지들과 의론하고 이 비석을 목하 황씨의 강습소로 옮기어 두었는데 앞으로 북시장 공원에 삼학사비를 다시 세워 오래, 오래 지사의 혼을 기념할 터이라는데, 현재 봉천총영사관 부영사 오두환(吳斗煥)씨와 관동군사령부의 윤상필(尹相弼) 대위가 이 삼학사 오달제, 윤집의 후손이라고 한다. 위 동아일보 보도외에도 동년5월12일자의 <매일십보>의 같은기사, 1934년6월3일 <조선중앙일보>에도 삼학사유적보존회 창립과 관련기사가 보도 되었다.


삼학사중수비(三學士重修碑)





* 중국 심양 발해대학에 세워진 삼학사 재붕수비 (三學士再重修碑)

1935년 병자호란 300돌을 기념하여 당시 항일운동의 거점도시였던 봉천(지금의 심양)에서 황인덕.김구경등이 중심되고 삼학사유적보존회와 조선동포 120여명이 모금하여
심양시 춘일공원에 삼학사중수비를 건립하고 삼학사의 절개와 민족혼을 지켜 조국독립을 염원하는 추모제를 올렸다. 이중에는 일본인도 있었다니 그들의 삼학사에 대한 역사관을 엿볼 수 있다.

<중수삼학사비기(重修三學士碑記)>

조선은 단군이 나라의 기틀을 세웠고 기자가 강역을 열었다. 풍속이 충효를 숭상하고 선비들은 인의에 도타우니, 예로부터 예의의 나라로 일컬어져 왔다. 300년전인 인조 14년 병자년 겨울 청태종이 조선을 침략했다. 남한산성의 형세가 위태롭자 조정에서는 강화를 청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이때 대간 홍익한. 교리 윤집. 수찬 오달제는 대의를 부르짖으며 화의를 배척하였다. 화의가 이루어자 삼학사는 척화의 수괴로 지목되어 심양에 잡혀갔다.

청 조정에서는 이들을 귀순시키고자 하여, 온갖 영예와 이익으로 회유하는 한편 엄혹한 형벌로 협박하였다. 허지만 세분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다음해 3월에 죽었다. 그 높은 절개와 큰 의리는 일월과 빛을 다투고 만고에 썩지 않을 것이다. 이에 나라에서는 남한산성에 현절사, 부여에는 창절사를 세웠고, 경상도 영천에는 장엄서원을 개창하여 그 정신을 기렸으니 향사가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다. 청조에서도 그 곧은 의리를 포장하여 심양성 서문밖에 사당을 건립하고 비석을 세워 그 위에 삼한산두(三韓山斗)를 새겼다. 삼한이란 조선을 가리키고, 산두란 그 절의가 태산북두처럼 빛난다는 뜻이다.

사당과 비석을 세운 전말이 청나라 사람이 쓴 일사(軼史, 일종의 야사)에 실려 있다.계유년 겨울 나는 심양에 머물면서 그 유적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하지만 세월이 오래되어 사당과 비석은 모두 사라졌다. 교외에서 옛일을 조상하는데 감개한 탄식을 이길수 없었다. 마을의고로에게 물어보니, 소서문 밖 세분이 순절한 곳에 작은 절이 있었는데, 조선의 세분을 모신 사당으로 전해진다고 하였다. 지금의 북시장(北市場) 보령사 (保靈寺)근처이다. 절문 앞 눈구덩이 속에서 비액(碑額)하나를 찾았는데, 글자를 새긴 흔적이 있었다. 흙을 씻어내고 보니 '삼한산두' 넉자가 찬연하니, 일사의 내용과 서로 딱 맞았다. 절의 주인과 상의하여 내가 사는 집으로 옮겨두고, 두루 비신을 찾았지만 찾지 못하여 오래도록 아쉬운 마음을 금치 못하였다. 이때 심양에 사는 여러 현자들이 그 사연을 영원히 하고자 하여' 삼학사유적보존'를 발기하였다. 각자 나누어 성금을 모아 새로 비신과 귀부를 조성하고 여기에 비액을 얹어 다시 세웠다. 이로써 충절의 기상은 위로 해와 별을 꿰뚫으니, 세상이 변하여 때로 숨겨지기도 하지만 결국 영원히 묻히게 하지 않으며, 사람들의 말없는 느낌은 귀신의 기호와 상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영원토록 보존되어 흙더미 속에 묻히지 않게 되기를 후세의 군자들에게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짓는다.

인조 병자년으로부터 300년이 지난 을해년 봄 3월에
창원 황윤덕이 삼가 짓고 경주 김구경이 삼가 쓰다.
(번역 이승수)

그러나 삼학사중수비를 세운 조선동포들의 염원은 1966년 중국의 문화혁명 소용돌이를 비켜가지 못하였다. 홍위병들이 이비를 강변에 내다 버렸고, 이후 어느 중국인의 집 주춧돌에 놓인것을 당시 랴오닝대 교수이자 중국과학자협회 부이사장인 천문갑(현 발해대학장)이 인민페 5천위안에 구입하여 발해대학에 갖다 놓았다고 한다.

역사와 현실은 항상 이데올로기의 관계선상에 있는 것인지, 삼학사의 유일한 현장 유물인 중수비는 어떤 연유인지 훼손되고 방치된체 한. 중 국제교류의 개화 시대에 이르기 까지 질곡의 역사를 지켜왔다.

삼학사재중수비(三學士再重修碑)

1997년 허창무. 신청등이 성남문화원 부원장으로 남한산성의 문화권역을 학술적으로 재 조명하고 '삼학사 모시요!'등 사업을 개시하였다. 한편,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사람들(남사모)의 모임이 결성되면서 본격적인 삼학사 정신선양의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경기도가 남한산성 행궁을 복원하고 산성복원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삼학사에 대한 성남 광주 문화권역의 연대가 이루어 진것도 역사되찾기의 맥락에서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광주문화원이 주관된 현절사의 삼학사 추모제가 언론의 관심으로 등장되었다.

2004년 허창무. 신청. 고재혁.서학선등이 주도하여 요녕발해대학교후원회(회장 허창무)를 결성하고 동년 12월 발해대학에서 첫번째 삼학사추모제를 고재혁 주도로 올렸다.

이를 계기로 방치되고 훼손된 삼학사중수비의 복원이 활발하게 논의되던중 계룡건설 장학재단(이사장 이인구)이 후원하여 2005년 7월 30일 드디어 요녕발해대학 교정에 삼학사 재중수비와 학사정을 세웠고 방치된 중수비도 발해대학내 보관 전시하게 되었다



중국심양 발해대학 교정의 "삼학사 재중수비"  곁에서 -2005. 12. 22. 

'삼학사 추모제'를 위해 2005. 12. 21.~12. 25. 중국심양 발해대학 방문 중)

훼손된 중수비를 보관하고있는 전시실에서(좌로부터 염창순, 고재혁, 필자, 류수남, 신청)

삼학사재중수비는 중수비와 같이 용두 2m. 폭83cm.두께 26cm. 높이 390cm로 거북형상의 비대로 비두와 함께 학자들의 고증에 따랐다고 한다. 한편, 계룡건설장학재단은 요녕발해대학에 세운 똑같은 모조비를 동년 8월 31일 천안 독립기념관에도 건립하여 삼학사의 충정을 후대에 귀감토록 하였다.

후일의 사가들은 병자호란 당시 항복문서를 쓴 사람도, 이를 찢은 사람도 "열지자 충, 결지자 충"의 양시론(兩是論)을 펴고 있어 사관의 객관적 접근이 아쉬운 현대사회의 기류이다. 

삼학사 추모제에 헌화 

 

-삼학사추모제 일행-2005.12.22. 심양 발해대학 강당
삼학사추모제의 참가는 심양시의'한국주간'에 성남예술단장으로 수 차례 방문한바 있는 필자로서는 민간차원의 문화사절 사명감에 또다른 한국인의 기상을 의식한데서 느낌이 깊다.

삼학사의 항쟁이 베어있는 역사의 현장인 남한산성 문화권에 하루빨리 삼한산두(三韓山斗)의 삼학사비가 세워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김성태 st3845@hanmail.net/성남타임즈 편집인.경기예총 수석부회장

기사등록 : 2006-01-04 14:2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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