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ethoven's Symphony No. 9 (Scherzo).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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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속 음악여행]베토벤의 열정 |
최우혁 음악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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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과 그의 음악’ 베토벤(L. Van Beethoven·1770-1827)은 13세 때 아버지의 권유로 학교를 그만 두었고, 제2의 모차르트가 되길 꿈꾸며 가정에서 아버지로부터 혹독한 음악교육을 받았다. 16세 되던 1782년, 베토벤은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당시 30세이던 모차르트를 만나게 됐지만 모친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고향인 독일의 본으로 돌아와 5년 동안 집안의 가장 역할을 했다. 1792년 23세 때, 베토벤은 다시 오스트리아 빈으로 유학을 갔지만, 모차르트는 이미 사망한 후여서 더이상 그에게 음악교육은 받을 수 없었다. 1795년 탁월한 피아노 연주로 빈 음악계에 데뷔한 베토벤은 귀족 사회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30세가 되던 해 귓병을 앓기 시작했던 베토벤은 귓병 치료 차 하일리겐슈타트(Heiligenstadt)로 요양을 떠났지만 차도를 보이지 않는 병세로 인해 유서를 작성하고 자살을 기도했다. 현재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라고 불리고 있는 베토벤의 유서가 사후에 발견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유서와 함께 발견된 3통의 편지 중에서 두 동생들에게 보낸 편지 외에 한 통은 수취인 불명의 ‘나의 불멸의 여인에게’ 라고 적혀있어 아직까지 논제가 되고 있다. 한때 약혼을 했으나 파혼했던 테레제라는 여인일까? 아니면 자신의 피아노 소나타 제14번 ‘월광’을 헌정 했던 줄리에타일까? 영원한 궁금증 일 수밖에 없다. 40대 중반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베토벤은 서면(대화장)을 통해서만 대화가 가능했다. 그는 이런 신체적 결함을 음악의 힘으로 극복하고 창작에 몰두했다. 말년의 작품 중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이 그대로 녹아있는 교향곡 제9번 ‘합창’은 베토벤 음악의 절정을 이루고 있으며, 고금의 교향곡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1824년 5월,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초연된 이 작품은 오케스트라 연주로만 이뤄지던 기존의 교향곡 형식에 독창과 합창이 함께 사용된 최초의 음악으로 그 의미가 크다. 이미 귀가 들리지 않는 베토벤이었기 때문에 오케스트라 중간에 부 지휘자가 베토벤에게 신호를 보내며 연주를 해야 했다. 연주가 끝난 후, 등 뒤에서 일어나는 청중의 환성과 박수를 느끼지 못했던 베토벤을 위해 솔로 가수 중 한 사람이었던 웅거(Caroline Unger)는 그를 부축해 청중을 바라보게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200쪽에 달하는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합창’ 원본 악보는 음악 악보로서는 유일하게 2002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육체적인 건강 악화로 베토벤은 소리와 완전히 단절된 상태였고, 또한 가난이 엄습했지만 이러한 고뇌를 음악으로 극복해 음악의 환희로 재탄생 시키며 역경을 이겨내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였다. 베토벤은 장 질환과 폐렴 등이 원인이 되어 1827년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베토벤이 사망한 날은 독일의 공식 휴일로 지정되었으며, 그의 장례 행렬에는 2만 여명이 모였다고 한다. 관청엔 조기가 걸렸고, 학교도 임시 휴교에 들어갔으며 광장 질서를 위해 군부대까지 배치되었다고 한다. 음악의 성인 ‘악성(樂聖) 베토벤.’ 그를 빼놓고는 클래식을 논 할 수 없다는 평가는 후대 사람들의 존경 어린 표현이 아닐까 생각된다. 1,000 여 곡이 넘는 작품을 작곡한 바흐나 600 여 곡이 넘는 작품을 남긴 모차르트에 비해 베토벤의 작품 수는 방대하지 않지만 그의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음악사의 커다란 유산으로 남겨지기에 충분하며, 베토벤 사후의 음악은 모두 베토벤의 아류작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다음 세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왜 나는 작곡하는가? 내 마음속에 있는 것들은 밖으로 표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음악은 사람의 정신을 불꽃으로 뿜어 올리게 한다. 그래서 나는 작곡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 베토벤의 말은 음악에 대한 베토벤의 열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문장이 아닐까 생각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