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09. 6.25. 심장마비로 사망. 팬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마이클 잭슨은 1996년 첫 내한 공연을 시작으로 1999년 한국을 찾은바 있습니다.
마이클과 김대중 대통령
'팝의 황제'는 갓 걸음마를 뗄 때부터 달랐다.
1958년 미국 인디애나주에서 9남매의 일원으로 태어난 잭슨은 말보다 노래를 먼저 흥얼거린 음악 영재였다.
형제들과 조직한 '잭슨 파이브'에서 형들을 제치고 불과 다섯 살의 나이로 리드 보컬을 맡아
천부적인 노래 실력을 뽐내면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당시 이들을 발탁했던 흑인 음악의 종가 모타운 레코드사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선배 가수 라이오넬 리치는
최근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 작은 아이(마이클 잭슨)는 첫 노래에서 모든 걸 보여줬다.
무대 뒤에서 여느 어린이들처럼 물풍선을 갖고 놀던 잭슨은 무대에만 오르면 괴물급 연예인으로 탈바꿈했다"고 회고했다.
신동은 곧 황제로 성장했다.
솔로로 독립해 음반 '오프 더 월'과 '스릴러'. '배드' 등을 차례로 발표하면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뒤를 잇는 '팝의 황제'(King Of Pop)로 등극했다.
특히 '스릴러'가 팝의 역사에 남긴 흔적은 자세한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화려하고 경이롭다.
이제까지 약 1억 4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 중이며. 앨범 수록곡 9곡 가운데 무려 7곡이 빌보드 싱글 차트 톱10에 올랐다.
이후에도 그가 내놓는 음반들은 대중적인 인기와 완성도에서 늘 최고를 달렸다.
그러나 명암의 대비는 극명했다. 음악적으로는 더 이상 오를 데가 없을 만큼 최고의 자리를 지켰지만. 사생활은 불행하기 짝이 없었다.
흑인 특유의 곱슬머리와 펑퍼짐한 코를 바꿔보려고 성형수술을 거듭했지만 갈수록 부작용만 얻었다.
성적 취향의 모호함도 그의 몰락을 부추겼다. 솔로 초기에는 엘리자베스 테일러. 다이애나 로스 등
이모뻘의 연상녀들과 교제하는 등 다소 엉뚱해 보이는 남녀 관계에 집착했다.
이어 프레슬리의 외동딸 리사 마리와 결혼하지만 이혼했으며 간호사 출신의 백인 여성과 재혼했지만 역시 갈라섰다.
두 번의 결혼에서 2남1녀를 두고 있으나 이들이 친자녀인지는 지금까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황제의 권위를 무너뜨린 결정적 화근은 소아애호증이었다. 어린이들을 자신의 집인 '네버랜드'로 불러들여
몹쓸 장난을 쳤다는 성추문에 휩싸이면서부터 처참하게 망가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거듭된 송사에 시달리게 되면서 대중은 잭슨을 차갑게 외면했다.
계속된 추문은 황제의 정신 상태까지 혼미하게 했다. 팬들에게 자랑하겠다면서 호텔 발코니에서 어린 자녀들을 손으로 번쩍 들어 보이고.
파자마 차림으로 법정에 지각 출석하는 등 누구도 이해하기 어려운 기행을 저질렀다.
소송 비용으로 전 재산을 거의 탕진한 뒤 최근에는 중동권 국가로 보금자리를 옮겼지만.
사기 혐의로 소송에 휘말리는 등 금전적인 운세도 매우 불행했다.
최근에는 재정적 어려움을 벗어나고자 전 세계 순회 공연을 계획했지만.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됐다.
조성준기자 when@ 모바일로 보는 스포츠서울뉴스(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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