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남문화원 개황
1978년 7월, 조명천(趙明天)을 이사장, 김은집(金銀集)을 원장으로 하여 김성태(金聖泰), 윤석구(尹錫九), 김한성(金漢成),
황인태(黃寅台), 권오호(權五虎), 서상열(徐相烈), 송종건(宋種建) 등이 중심이 되어 성남문화원 설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설립 기금 모금을 위한 서화전 결과와 임대 보증금 및 재정 결산 이해 관계로 설립 준비 과정이 절박한 상황을 맞게 되었고,
추진위는 조명천을 원장으로 재 선출, 수정구 신흥동 임대 건물에서 수정구 태평동 3676번지 조명천 소유의 건물로 이전,
1980년 9월 30일부로 문공부의 설립 허가(문공 제341호)를 받고 동년 10월 20일 사단법인 등기를 필하였다.
성남문화원 개원식에는 한국문화원연합회장 노산 이은상과 이봉학 시장 등이 참석하였다.
설립 이후 임홍규(林弘圭), 강신중(姜信重), 방보영, 정금란.방영기(方榮基), 신일섭(申一燮) 등이 참여하였으며,
1982년 1월 4일 시민회관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1984년 9월, 2대 원장에 유임된 조명천이 1985년 10월 28일 임기 중 사퇴하기까지는 성남문화원 행정기반 조성 전반의 기조를
다지면서 민속놀이 「널다리쌍용줄다리기」, 「지경다지기」 등 발굴 재현으로 경기 민속 경연대회에 참가하였고,
조선조의 여류 문인 「강정일당 사료조사」 등 향토문화의 발굴?보존사업에 힘썼다.
한편, 「시민백일장」, 「학생미술공모전」, 「충효?반공웅변대회」 등을 연례적으로 개최하여 일반 문화행사의 개시와 열악한
환경 개선에도 노력하였다.
원장 직무대행 중이던 임홍규가 1986년 2월 성남 예총 초대 지부장에 선출되어 사실상 직무 수행이 원활치 못하여
1986년 7월 이사회는 권기흥(權奇興)을 영입하여 잔여 임기의 원장으로 선출하였다.
권기흥은 문화원을 시민회관(2층)에서 수정구 신흥동의 반공회관으로 옮겼으며 3개월여 만에(1986년 10월) 다시 시민회관으로
이전하였다. 성남문화원 제3대 회기 개시를 전후하여 권기흥이 3대 원장에 유임되는 과정에서 성남 문화원 법인 등기되어 있는
이사진을 제외시킨 총회 및 원장 선출은 불법이라는 이사진들의 이의가 합당하다고 관계 당국이 판단하게 되어 원장 승인이
지연되고 현지 조사관이 파견되는 사태가 발생하였으나 발전적으로 수습되어 1988년 9월 3대 임기를 5개월여 지난 1989년 3월
원장이 인준되는 진통을 겪기도 하였다.
당시 영입된 임원 및 중진 인사로 조윤제(趙潤濟), 정형주(鄭亨柱), 고재혁(高濟赫), 주수광(朱秀光), 이창열(李昌烈), 홍사영 등이 참여하였다.
권기흥은 원장 재임 동안 「남한산성 축성놀이」 경기 민속 경연 출전과 <성남 문화> 회보지와 「미스 성남 선발대회」,
「장사 씨름대회」 등 일련의 행사 외에 향토유적 학술조사에 힘써, 한산이씨 묘역은 경기도 기념물 제116호, 전주이씨
서원군파묘역(瑞原君派墓域)은 경기도 기념물 제118호, 한산이씨 수내동 가옥은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84호로 지정되는데
일조하였으며, 1991년 11월 2일부로 3대 임기 중에 사퇴하기에 이른다. 부원장 조윤제가 원장 직무대행 체제를 유지하다가
1992년 2월 잔여 임기의 원장으로 이용상(李容相)을 선출하였다.
1993년 5월 23일 제4대 원장에 피선된 이창열은 문화원의 제정 확보와 문화인력 조직 강화를 위하여 후원회 성격의 자문위원제를
확대하면서 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를 개설하고 연구소장을 겸직하면서《성남문화연구》
(1994년 5월 20일 창간호(총 305쪽, 신국판형, 논문 7편 수록) 1, 2호(총 202쪽, 신국판형, 논문 6편 수록)를 발간하여
성남문화원의 향토연구학술 체계화 작업에 노력하였다. 이 때 전보삼, 한춘섭, 이형구, 어순영, 김창환, 백남욱 등이 참여하였다.
1974년 7월 8일의 문화원 특별법 <지방문화원진흥법> 시행이 공포되어 성남문화원은 1994년 8월 1일 위 법에 의한 특별법인
단체로서의 창립총회와 동년 9월 7일 설립 인가(문체 193호)를 필하였으나 이는 성남문화원의 새로운 재 설립이 아니고
법령에 의한 절차일 뿐 승계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이창열이 4대 임기 중 1995년 7월 중도 사퇴하므로 1995년 8월 27일 이형하(李亨河)를 잔여 임기 원장에 보선하였다.
1996년 10월 25일 문화원이 시민회관에서 분당구 이매동 소재의 현 농협기술센터로 이전하여 동년 11월 18일 문화원 부설 문화대학을
개설하고 문화인구 저변 확대를 위한 문화 강좌를 실시하는 기초를 마련하였고 <성남문화연구> 제3호
(총 417쪽, 신국판형, 논문 10편 수록)을 발간하였다.
당시 허창무(許昌武), 신청(申淸), 이영성(李榮成), 소진광(蘇鎭光), 조병로(趙炳魯), 장철수(張哲秀) 등이 참여하였다.
성남 문화원이 설립 이후 13여년 여의 태동, 과도기를 지나 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문화학교 등을 개설하여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면서 5대 회기에 접어들던 1997년 1월 10일, 오세순(吳世淳)을 5대 원장으로 선출하였다.
문화원은 동년 9월 예덕관을 부설기구로 개설하였고 <성남문화연구> 제4호(1996~ 1997년) 발간, 제 1, 2회 국제학술회의
‘남한산성과 삼학사’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였다. 그러나 내부 갈등이 심화되어 원장과 임원진 간의 법정소송 사태가 돌발하게
되어 정상 운영이 되지 못하고 문화원의 오점을 남기는 등 혼선 속에서 오세순은 원장 취임 1년 만인 1977년 12월 31일부로 원장직을 사임하였다.
1998년 3월 9일, 남선우(南善祐)를 원장으로 선출하고 임원진이 새로 구성되었으며, 1997년 9월 21일 부설 문화대학이
문화관광부로부터 전문화 학교로 지정(제234호), 문화대학의 공공교육 기관의 위상이 정립되는 계기도 마련하였다.
한편, <성남문화연구>를 계속 사업으로 발간하여 성남문화연구의 체계를 정착화 하였으며 학술회의 토론회, 논문집 발간 등 연례 사업화하였다.
그러나 5대 회기의 문화원은 내부적인 조직의 갈등이 증폭되어 2001년 이사진의 원장직무 정지가 처분 신청 등 법정소송이
또 다시 발생하여 문화원의 위상이 침체되고 정상 운영이 혼선을 초래하여 지역사회의 지탄을 받는 시련을 거쳤으나
발전적으로 수습되는 과정을 겪기도 하였다.
2002년 3월 8일, 제6대 원장에 남선우가 재임되었다. 2003년 8월 성남문화원이 성남문화의 집으로 이전하였으며,
성남문화의 집과 서현문화의 집을 위탁운영하고있다.
(* 첨기-2006년부터 한춘섭(시조시인)이 원장으로 재임중이다.)
성남시사 30년사 성남문화원편 중에서
성남문화원 개원 현판식- 조명천(초대원장). 이은상(한국문화원연합회장).이봉학 성남시장등.
- 건배제의 하는 김성태(성남예총 회장)
성남시민회관(2층)에 있던 성남문화원이 분당 농촌지도소(2층)로 이전. 현판식 및 기념리셉션.
(오성수 시장은 문화원을 옮기고 성남예총을 시민회관2층으로 이전하도록 행정조치하였다.)
좌:오세순(문화원 부원장). 김성태. 이용상(전 문화원장).오성수 시장. 이영하 문화원장. 최명근.이영성.허창무등..
제5회 경기민속경연대회 성남대표단 '남한산성 축성놀이' 총 연출로 참가 - 1986. 9. 수원종합운동장
제5회 경기도민속경연대회에 '산성축성놀이'( 총연출/ 김성태)
성남문화원(원장 권기흥) 주관으로 풍생교교생 200명등을 이끌고 참가.(수원종합운동장)
-198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