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문화원, 2010 둔촌 문화제 개최

둔촌 추모 시 ‘큰 기침 소리’, 창작무용 ‘둔촌, 학(鶴)으로 살다’ 초연 공연

성남문화원(원장 한춘섭)은 성남의 큰 어른 둔촌 이 집(1327~1387 / 고려말 성리학자, 경기도기념물 제219호)선생의 효행과 충절심을 기리는 ‘2010 둔촌 문화제’ 첫 번째 행사를 5. 9(일) 오후 4시 성남아트센터 앙상블씨어터에서 개최한다.

이날 행사는 성남농악보존협회의 ‘판굿’ 을 시작으로, 경기도립 리듬앙상블 의 ‘아리랑 환타지’, ‘비상’, ‘몽금포 퓨전’ 에 이어 ‘제2회 둔촌상 시상식’이 있고 성남 국악계를 대표하는 방영기 명창이 둔촌 作 ‘정훈’을 시창하며 국내 뮤지컬계의 신데렐라로 우뚝 선 뮤지컬배우 이혜경, 서정수의 뮤지컬 하이라이트 ‘나가거든’(명성황후) ,‘Take me as I am’( 지킬 앤 하이드), ‘영웅’(뮤지컬 영웅), 산성 ART FOR 人  남성 팝페라 그룹 ‘보체 아르모니아’ 의 둔촌 추모 ‘큰 기침 소리’ (한춘섭 작사/ 이선택 작곡)와 성남무용단 (안무/ 김종해)의 창작무용 ‘둔촌, 학(鶴)으로 살다’」가 초연 공연된다.

성남문화원 한춘섭 원장은 “성남문화원이 앞장 서 둔촌선생 묘역 문화재 지정, 학술토론회 개최, 둔촌 청소년문학상 백일장, 시조시, 한시, 중국 백일장, 둔촌이야기 자리 등 다양한 문화사업을 연례적으로 개최해 오며 성남시의 역사 속 큰 인물 추앙사업 본보기를 제시했다” 며 “앞으로 둔촌문화제를 우리나라 향토성 문화제로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공연장 입장은 6세 이상 선착순 좌석 예약자에 한해 무료입장 할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성남문화원 756-1082으로 문의하면 된다.

 

 

성남의 큰 어른 '둔촌 선생'
방송일:2010-04-29
봄기운을 잃은 쌀쌀한 4월.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곳, 둔촌사당 '추모재'에 모였습니다.   고즈넉한 서당에는 둔촌 이 집 선생의 정신이 ...

성남문화원, 2010 둔촌 백일장 행사 개최
성남문화원과 둔촌연구회 주최... 청소년백일장, 한시백일장이 오는 5월8일 열려
2010년 04월 28일 (수) 14:50:30 김영호 기자 news@goodtms.net

   
▲ 지난해 2009년 둔촌한시백일장 모습 @ 사진제공 / 성남문화원
성남문화원(원장 한춘섭)과 둔촌연구회는 둔촌 이 집(1327~1387 / 고려말 성리학자, 경기도기념물 제219호)선생과 아들 탄천 이지직(성남시 향토유적 제7호)의 효행과 충절심을 기리는 ‘2010 둔촌 백일장’ 행사를  5월 8일 오전 10시 부터 하대원 대원공원과 중원청소년수련관 체육관에서 개최한다.

이날 행사는 청소년백일장, 한시백일장으로  둔촌연구회가 주최하는 ‘청소년백일장’은 성남. 광주. 하남시 소재 중. 고등학생이 학교장의 추천을 받아 참가할 수 있으며, 성남문화원이 주최하는 ‘한시백일장’은 전국에서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기타 자세한 사항은 성남문화원 홈페이지 www.seongnamculture.or.kr  또는 전화 031) 756-1082로 문의하면 된다.

성남문화원, 회원 만장일치 추대로 ‘제11대 한춘섭 원장’에 연임

성남문화원은 2010년도 정기총회에서 한춘섭(69. 시조시인, 향토사학자) 현 원장을 제11대 원장으로 회원 만장일치로 추대 선출해, 3월 8일 성남문화가족들이 함께한 가운데 조촐한 취임식을 가졌다.

한 원장은 2006년부터 10대 원장으로 일하면서, <성남문화연구>, <마을지> , <성남인물지> 발간, 학술회의·학술토론회 개최, 판교 쌍용거줄다리기 복원·시연, <성남금석문대관>, <성남3·1운동 자료조사 연구 자료집>, ‘천림산 봉수 복원’ 등의 향토사 연구에 매진해왔으며, ‘성남시 향토유적 발굴·지정 및 재조명 작업’ 등을 마무리 지어 왔다.

또한『성남3·1만세운동 기념식』,『광복절 성남경축식』,『순국선열 추모제』등의 국경일 및 기념일 행사는 물론,『성남사랑 글짓기 대회』,『강정일당상 시상』,『정월대보름 민속놀이』와 성남시와 국제자매도시인 중국 심양시에서 ‘둔촌백일장’을 개최 등 연간 40여 가지의 문화사업 개최에 앞장서 왔다.

한춘섭 원장은 양평 출생으로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시조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후, 38년간 교육자로 봉직했으며, 성남문화원 개원부터 현재까지 향토문화연구소 창립소장, 부원장, 원장으로 31년간 성남의 전통문화 조사, 연구에 헌신하며 그 동안 향토연구 논문 20여편 발표, 개인저서 13권 발간했으며 성남펜클럽 창립회장, 성남탄천문학회 회장, 성남문화정보센터 운영위원장, 둔촌청소년문학상 운영위원장, <성남시사> 집필위원, 성남시민헌장 제정위원, 성남향토유적보호위원, 성남시 지명위원회 위원 등 성남문화계의 산 증인으로 활동해 온 문화예술인이다.

한춘섭 원장은 “10대 원장으로 4년간 다져 놓은 성남문화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성남지역 전통문화 계승, 발전에 더욱 혼신의 힘과 열정을 다 하겠다”며, “성남시민이 품격 높은 문화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앞장 설 것”이며, “성남의 랜드마크가 될 역사 속 인물 찾기”와 “남한산성 일원의 문화 컨텐츠 융화(融和)에 주력해 갈 생각”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한춘섭 원장은 3월 8일 부터 4년 임기의 원장직을 연임 한다.

*판교쌍용거(巨) 줄다리기 민속놀이 시연이 판교개발과 신축으로 5년간 중단되었다가 정월 대보름을 맞아

재현, 성남문화원과 쌍용줄다리기보존회가 2010. 2. 28. 오후 3시 분당구청 잔디광장에서 개최.

 

(자료사진)


‘판교 쌍용거줄다리기’는 성남문화원이 1980년에 복원· 재현해, 1984년부터 경기도 민속예술축제 등에 출전 이후,

2005년 판교신도시 개발로 중단됐다가  2009년 보존회를 재정비시켜, 여주군 점동면 삼합리에서 볏짚을 마련하고,

 판교 원주민 20명이 동아 줄을 꼬아, 한국농악보존협회 성남시지회와 성남농협 주부농악단과

판교동 입주자 등 300여명이 흥겹게 시민화합과 축제의 장으로 시연하게 됐다.
 
줄다리기는 쌍줄을 이용해 암줄과 숫줄로 편을 나누고, 풍물과 함께 청룡줄에는 기혼 남성이,

황룡줄(암줄)은 아낙네와 미혼남녀가 편을 이루고, 용두라고 부르는 줄 머리에 비녀처럼 생긴 커다란 비녀목을 꽂아

암줄과 숫줄이 하나로 결합된 상태에서, 세 번의 줄다리기를 겨루는데

암줄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하여, 이기는 것으로 속설이 전해오고 있다. 
 
  그동안 성남문화원은 개원 이후 31년간, 사라져가는 지역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후손들에게 계승하고

문화성남의 자긍심 고취를 위해,‘지경놀이’,‘남한산성 축성놀이’,‘이무술 집터 다지는 소리’,

‘봉국사 공주 천도제’,‘반가 상여 소리’,‘오리뜰 농악’등을 복원해 왔다.

 

                                                                                         (사진: 조성란)

 

 

 

동아줄 꼬기 

성남국악협회 방영기(총연출)와  심미자. 김복심 회원이 소리매김 

암줄과 숫줄의 용두가 맞대여 싸움이 시작 

앞 좌 : 김대진 성남시의회 의장. 이대엽 성남시장. 고흥길국회의원(문광위원장). 임태희 노동부장관내외. 한춘섭 성남문화원장. 김성태 

 

 

한춘섭 성남문화원장과 

행사장에서 만난 성남 시민포럼 회원들  좌 : 최용희. 성현례. 김성태. 장정은. 김광열. 

좌: 남기형. 방영기. 황평산. 김광열 성남문화원 이사진과  김성태.

성남 3·1만세운동 기념식 개최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기념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 열려
 
조덕원
성남문화원(원장 한춘섭)은 제91주년 3·1절을 맞아, 오는 3월 1일 오전 10시 30분, 분당 율동공원 내에 위치한 성남 3.1만세운동 기념공원에서‘성남 3·1만세운동 기념식’을 개최한다.
 
이날 기념식은 한국농악보존협회 성남시지회의 ‘풍물놀이’ 식전행사와 국민의례,  ‘성남3·1운동 약사보고’, 한춘섭 문화원장의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시장, 시의장의 경축사로 진행되며, 헌시 '만세 터에 서서‘(작시 한춘섭)낭송과 기념공연 '검정 고무신', 3·1절 노래 제창, 만세 삼창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 성남 3·1만세운동 기념식     ©뉴스페어

한편, 성남문화원은 한백봉, 한순회, 남태희 선생의 주도하에 주민 3,000여 명이 천지를 진동할 만큼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던, 분당구 율동에 역사적인 만세운동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2006년 3월 1일 성남 3.1만세운동 기념탑을 제막했고, 올해「제91주년, 성남 3.1독립만세운동 기념식」을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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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2회 강정일당상 수상자

강정일당은 시문과 서화,  성리학과 경술 등 학문에 밝고 (40여편의 유고집) 정숙과 단정함이 타에 표양이 된 조선조의 여류문사로

성남시 금토동 청계산 기슭에  있는 그의 사적과 묘소는 성남시향토유적 제1호로 선정된 인물이다.

성남문화원은 강정일당의 효 정신과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 보존 계승하려는 취지로 강정일당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행하고 있다.

(성남거주 3년, 50세 이상의 여류를 각계의 추천으로 심사를 통해 선정)

 

2009.10. 9. 오후 4시 성남문화원 전시실에서는 올해로 열두번째 시행하는 강정일당상에 사랑의 봉사회 안옥자 회장이 수상자로 결정되어

 한춘섭 성남문화원장으로 부터 상패와 부상을 받았다.

 수상자 안옥자 여사는 1989년사랑의 봉사회 창립을 주도하고, 20여년간 '새 생명살리기 운동;을 전개하여 심장병과

 백혈병 어린이 104명이 수술받는데  앞장섰고, 중중 장애인 병원 수송차량을 지원하고,독거노인 도시락 배달운동, 환우돕기,

사랑의 동전잇기 운동 등 지역사회에 어려운 이웃을 위해 헌식적 봉사에 앞장선 공로와 이웃의 표양이 된 인물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한편, 이날 제2회 성남문화원의 날을 경축하고 강정일당을 기리는 '성남사랑 글짓기'  입상자 시상식도 함께 진행되었다.

 

                                                                                                                      -2010. 10. 11.   - 징소리 김성태

                                                                                                                                           ( 사진: 조성란)

 

 

 

제13회 수상자 김영의 -2010. 10. 11.

 

 

 

한춘섭 성남문화원장이 안옥자 강정일당상 수상자에게 시상하고 있다. 

 

한춘섭 원장의 인사말 중  

좌 : 김성태. 안옥자 강정일당상 수상자 

축하 내빈 좌 :한성심(성남시의원). 김성태. 이재명(민주당 부대변인, 변호사). 안옥자 (수상자)

좌: 한춘섭(성남문화원장). 서인수(강정일당상 심사위원장, 성남장학재단 이사장). *. 정재영(경기도의회 의원). 윤광섭(신상진국회의원 보좌관)

 

* 시계방향 -정기영(성남시의원). 이재명(민주당 부대변인, 변호사). *. 박영애(성남시의원). 안옥자(수상자). 한춘섭(성문원장). 김성태(징소리)-2009. 10. 9. 오후4시 성남문화원 강정일당상 시상식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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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강정일당상 수상자

*  2008.10.10. 제11회 강정일당 상을 수상한 이영성 여사는 시민포럼을 창립하고 함께 공동대표를 역임한

관계로 각별히 친교를 나누고 있어 축하의 자리에 함께 했다.

                                                                                                                   

강정일당 상 수상자 이영성 여사  

 

 축하케익 절단 -좌 : 전영수(경기도 교육위원, 이영성 여사 부군). 이영성. 한춘섭(성남문화원장). 김성태(징소리). 

 

 

 축하 건배 제의                                   

 


   * 경기도 광주시가 주최하고 광주문화원이 주관한 제13회 남한산성문화제 일환의 ' 조선군사열병식"이 열린 광주시 청석공원을 찾았다.

  가을 한낮의 햇볕이 여름날과 진배없는 정오에 개최된 조선군사열병 재현과 수어사 이서장군 출정식,

  기관, 단체장(시장, 의장, 문화원장)의 '타 북' 등   기획사의 직원들만 동분서주...이벤트 축제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8필의 기마대와  군졸 복색의 인근 군부대 장병들, 여고(염광여상) 고적대, 전통무예시범단, 농악단들이  전통재현이 끝나기 바쁘게

  서둘러 거리행진을 떠나고, 청석공원(탄천)의 정막한 정수리로 가을 햇볕만 따갑게 내리쬔다.

  시민 총화를 위한 광주시의 대표 문화축전에 시민이 주역으로 참여 해야할 가장 중요한 당위성을 소홀이 하였다면 남한산성문화제의

  개최의미는 무엇인가!

  남한산성문화제를 주최하는 광주시와 광주문화원의 기획과 운영관리의 재 수정이 요구된다.

  남한산성의 가을 정취와 행사장 주위의 먹거리 난장에서 돼지고기 숭숭 띄운 국밥 맛이나 볼량이던 생각을 단념하고 말았다.

                                                                                                                                                      -2008.9.19. 징소리 김성태

 

 

 

 

 

 

 

 

 

 

 

* 성남문화원 개황

1978년 7월, 조명천(趙明天)을 이사장, 김은집(金銀集)을 원장으로 하여 김성태(金聖泰), 윤석구(尹錫九), 김한성(金漢成),

황인태(黃寅台), 권오호(權五虎), 서상열(徐相烈), 송종건(宋種建) 등이 중심이 되어 성남문화원 설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설립 기금 모금을 위한 서화전 결과와 임대 보증금 및 재정 결산 이해 관계로 설립 준비 과정이 절박한 상황을 맞게 되었고,

추진위는 조명천을 원장으로 재 선출, 수정구 신흥동 임대 건물에서 수정구 태평동 3676번지 조명천 소유의 건물로 이전,

1980년 9월 30일부로 문공부의 설립 허가(문공 제341호)를 받고 동년 10월 20일 사단법인 등기를 필하였다.

성남문화원 개원식에는 한국문화원연합회장 노산 이은상과 이봉학 시장 등이 참석하였다.

설립 이후 임홍규(林弘圭), 강신중(姜信重), 방보영, 정금란.방영기(方榮基), 신일섭(申一燮) 등이 참여하였으며,

 1982년 1월 4일 시민회관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1984년 9월, 2대 원장에 유임된 조명천이 1985년 10월 28일 임기 중 사퇴하기까지는 성남문화원 행정기반 조성 전반의 기조를

다지면서 민속놀이 「널다리쌍용줄다리기」, 「지경다지기」 등 발굴 재현으로 경기 민속 경연대회에 참가하였고,

조선조의 여류 문인 「강정일당 사료조사」 등 향토문화의 발굴?보존사업에 힘썼다.

한편, 「시민백일장」, 「학생미술공모전」, 「충효?반공웅변대회」 등을 연례적으로 개최하여 일반 문화행사의 개시와 열악한

 환경 개선에도 노력하였다.

 원장 직무대행 중이던 임홍규가 1986년 2월 성남 예총 초대 지부장에 선출되어 사실상 직무 수행이 원활치 못하여

 1986년 7월 이사회는 권기흥(權奇興)을 영입하여 잔여 임기의 원장으로 선출하였다.

 권기흥은 문화원을 시민회관(2층)에서 수정구 신흥동의 반공회관으로 옮겼으며 3개월여 만에(1986년 10월) 다시 시민회관으로

 이전하였다.  성남문화원 제3대 회기 개시를 전후하여 권기흥이 3대 원장에 유임되는 과정에서 성남 문화원 법인 등기되어 있는

이사진을 제외시킨 총회 및 원장 선출은 불법이라는 이사진들의 이의가 합당하다고 관계 당국이 판단하게 되어 원장 승인이

지연되고 현지 조사관이 파견되는 사태가 발생하였으나 발전적으로 수습되어 1988년 9월 3대 임기를 5개월여 지난 1989년 3월

 원장이 인준되는 진통을 겪기도 하였다.

당시 영입된 임원 및 중진 인사로 조윤제(趙潤濟), 정형주(鄭亨柱), 고재혁(高濟赫), 주수광(朱秀光), 이창열(李昌烈), 홍사영 등이 참여하였다.

권기흥은 원장 재임 동안 「남한산성 축성놀이」 경기 민속 경연 출전과 <성남 문화> 회보지와 「미스 성남 선발대회」,

「장사 씨름대회」 등 일련의 행사 외에 향토유적 학술조사에 힘써, 한산이씨 묘역은 경기도 기념물 제116호, 전주이씨

서원군파묘역(瑞原君派墓域)은 경기도 기념물 제118호, 한산이씨 수내동 가옥은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84호로 지정되는데

 일조하였으며, 1991년 11월 2일부로 3대 임기 중에 사퇴하기에 이른다. 부원장 조윤제가 원장 직무대행 체제를 유지하다가

 1992년 2월 잔여 임기의 원장으로 이용상(李容相)을 선출하였다.

1993년 5월 23일 제4대 원장에 피선된 이창열은 문화원의 제정 확보와 문화인력 조직 강화를 위하여 후원회 성격의 자문위원제를

확대하면서 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를 개설하고 연구소장을 겸직하면서《성남문화연구》

(1994년 5월 20일 창간호(총 305쪽, 신국판형, 논문 7편 수록) 1, 2호(총 202쪽, 신국판형, 논문 6편 수록)를 발간하여

성남문화원의 향토연구학술 체계화 작업에 노력하였다. 이 때 전보삼, 한춘섭, 이형구, 어순영, 김창환, 백남욱 등이 참여하였다.

1974년 7월 8일의 문화원 특별법 <지방문화원진흥법> 시행이 공포되어 성남문화원은 1994년 8월 1일 위 법에 의한 특별법인

단체로서의 창립총회와 동년 9월 7일 설립 인가(문체 193호)를 필하였으나 이는 성남문화원의 새로운 재 설립이 아니고

 법령에 의한 절차일 뿐 승계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이창열이 4대 임기 중 1995년 7월 중도 사퇴하므로 1995년 8월 27일 이형하(李亨河)를 잔여 임기 원장에 보선하였다.

 1996년 10월 25일 문화원이 시민회관에서 분당구 이매동 소재의 현 농협기술센터로 이전하여 동년 11월 18일 문화원 부설 문화대학을

 개설하고 문화인구 저변 확대를 위한 문화 강좌를 실시하는 기초를 마련하였고 <성남문화연구> 제3호

(총 417쪽, 신국판형, 논문 10편 수록)을 발간하였다.

당시 허창무(許昌武), 신청(申淸), 이영성(李榮成), 소진광(蘇鎭光), 조병로(趙炳魯), 장철수(張哲秀) 등이 참여하였다.

 성남 문화원이 설립 이후 13여년 여의 태동, 과도기를 지나 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문화학교 등을 개설하여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면서 5대 회기에 접어들던 1997년 1월 10일, 오세순(吳世淳)을 5대 원장으로 선출하였다.

문화원은 동년 9월 예덕관을 부설기구로 개설하였고 <성남문화연구> 제4호(1996~ 1997년) 발간, 제 1, 2회 국제학술회의

 ‘남한산성과 삼학사’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였다. 그러나 내부 갈등이 심화되어 원장과 임원진 간의 법정소송 사태가 돌발하게

 되어 정상 운영이 되지 못하고 문화원의 오점을 남기는 등 혼선 속에서 오세순은 원장 취임 1년 만인 1977년 12월 31일부로 원장직을 사임하였다.

1998년 3월 9일, 남선우(南善祐)를 원장으로 선출하고 임원진이 새로 구성되었으며, 1997년 9월 21일 부설 문화대학이

문화관광부로부터 전문화 학교로 지정(제234호), 문화대학의 공공교육 기관의 위상이 정립되는 계기도 마련하였다.

 한편, <성남문화연구>를 계속 사업으로 발간하여 성남문화연구의 체계를 정착화 하였으며 학술회의 토론회, 논문집 발간 등 연례 사업화하였다.

그러나 5대 회기의 문화원은 내부적인 조직의 갈등이 증폭되어 2001년 이사진의 원장직무 정지가 처분 신청 등 법정소송이

 또 다시 발생하여 문화원의 위상이 침체되고 정상 운영이 혼선을 초래하여 지역사회의 지탄을 받는 시련을 거쳤으나

 발전적으로 수습되는 과정을 겪기도 하였다.

2002년 3월 8일, 제6대 원장에 남선우가 재임되었다.  2003년 8월 성남문화원이 성남문화의 집으로 이전하였으며,

 성남문화의 집과 서현문화의 집을 위탁운영하고있다.

(* 첨기-2006년부터 한춘섭(시조시인)이 원장으로 재임중이다.)

                                                                                                                  성남시사 30년사 성남문화원편 중에서

 

 성남문화원 개원 현판식- 조명천(초대원장). 이은상(한국문화원연합회장).이봉학 성남시장등.  

           

                                                                                                                              - 건배제의 하는 김성태(성남예총 회장)

                         성남시민회관(2층)에 있던 성남문화원이 분당 농촌지도소(2층)로 이전. 현판식 및 기념리셉션.

                        (오성수 시장은 문화원을 옮기고 성남예총을 시민회관2층으로 이전하도록 행정조치하였다.)

                         좌:오세순(문화원 부원장). 김성태.  이용상(전 문화원장).오성수 시장. 이영하 문화원장. 최명근.이영성.허창무등..

 

                                   

제5회 경기민속경연대회 성남대표단 '남한산성 축성놀이' 총 연출로 참가 - 1986. 9. 수원종합운동장 

 

  

 

 

 

 

                 제5회 경기도민속경연대회에 '산성축성놀이'( 총연출/ 김성태)

성남문화원(원장 권기흥) 주관으로 풍생교교생 200명등을 이끌고 참가.(수원종합운동장)

                -1986.9.

 


         
충절의 향기-삼학사(三學士) 오달제(吳達濟)
2005.12.21~12.25일 까지 성남타임주 주관으로 삼학사추모제와 삼학사중수비가 보관된 전시장, 삼학사재중수비가 건립된 중국심양의 발해대학을 다녀온바 있다.
나라사랑의 충절이 더욱 간절한 오늘, 삼학사의 역사적행적을 요약이나마 되돌아 보는것도 현대인의 애국관에 새로운 성찰의 계기가 될것이다.


오달제吳達濟
1609(광해군 1)~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의(和議)를 반대한 3학사(三學士) 중 한 사람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아버지는 윤해(允諧)이다.

1634년(인조 12)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해 전적·시강원사서를 거쳐, 이듬해 정언·지평·수찬 등을 지냈다. 1636년에 부교리로 있을 때 청이 사신을 보내 조선을 속국시하며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하자 청나라 사신을 죽이자고 주장했으며, 주화파(主和派)인 최명길(崔鳴吉)·이민구(李敏求) 등의 주장에 따라 사신을 교환하게 되자 이들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해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끝까지 척화를 주장했다. 이듬해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한 뒤, 청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요구하자 스스로 척화론자로 나서서 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 등과 함께 청나라 심양(瀋陽)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고문과 회유에 굴하지 않고 항변하다 심양성 서문(西門) 밖에서 처형당했다. 그의 절개를 기리기 위해 고향에 정문(旌門)을 세웠으며, 영의정에 추증했다. 광주(廣州) 현절사(顯節祠), 평택 포의사(褒義祠), 홍산 창렬서원(彰烈書院), 고령 운천서원(雲川書院), 영주 장암서원(壯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렬공유고 忠烈公遺稿〉가 있으며, 〈묵매도 墨梅圖〉 2점이 전한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청태종은 강화도에서 잡은 포로를 송환한 다음 그들의 진중에 억류하였던 세자, 세자빈과 봉림대군을 인질로 하고 척화론의 주모자 오달제와 윤집을 잡아 심양으로 돌아갔다. 적장 용골대(龍骨大)는 오달제의 기개와 뜻을 꺽기 위하여 처자를 거느리고 청나라에 와 살 것을 권유하며 회유도 하고 협박도 하였지만 그는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불의(不義)라 주장하면서 저들의 말을 좇으면 오랑캐가 되고 마는 것이라하여 끝내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심양성 서문밖에서 윤집, 홍익한과 함께 처형을 당하니 세상에서 이들을 삼학사(三學士)라 부르며 그 절개와 충성심을 높이 기리게 되었다. 오달제가 심양에서 처형당하자 기이하게도 그가 태어난 원삼면 학일리(學日里) 마을에는 모든 풀들이 말랐다고 하는데 이로인해 지금도 마을 이름을 고초골(枯草谷)이라 부른다.
그는 묵매화(墨梅畵)에도 뛰어났는데 어몽룡(魚夢龍), 조속(趙速), 허목(許穆)의 화풍을 따르면서도 명나라 화풍의 영향을 받아 구도가 조금은 번잡한 감을 준다고 한다. 그의 그림으로 《묵매도(墨梅圖)》2점이 전하며 이러한 구도의 묵매화는 뒷 날 조지운(趙之耘), 홍수주(洪受疇), 박동진(朴東晋), 조희룡(趙熙龍), 이공우(李公遇)등의 그림에 영향을 주었다. 삼학사의 절개와 충의는 효종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포상되었는데 좌승지·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렬(忠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광주(廣州)의 절현사(節顯祠), 평택의 포의사우(褒義祠宇), 홍산(鴻山)의 창렬서원(彰書烈院), 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렬공유고(忠烈公遺稿)》가 있고 현재 모현면 오산의 양촌마을에 자리한 그의 묘소에는 평소 착용하던 요대만 묻혀 있으며 그 앞 좌우에는 부인 의령(宜寧) 남씨와 고령(高靈) 신씨의 묘가 있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상돈



의대(衣帶)만 모신 추담(秋潭)의 유택

추담(秋潭)의 유택은 모현면 오산리 산 47번지에 있으며, 입구에는 신도비와 그 뒷쪽에는 하늘을 찌르는 전나무가 있다. 몇 백년은 된직한 이 나무는 장방형 기단에 팔작지붕을 얹은 신도비 만큼이나 의젓하고 당당해 보인다. 농가 옆 길을 오르면 소나무가 양쪽으로 시립한 산 길이 있고, 그 입구에 안내판이 서 있다. 가파른 길을 오르니 묘 3기가 삼각형의 형태로 모셔져 있는데, 앞 쪽에는 부인 2분의 묘를 나란히 모시고 뒷쪽 중앙에 추담을 모시었다. 부인들 묘 중앙에는 ‘贈貞敬夫人 宜寧南氏之墓. 贈貞敬夫人 高靈申氏之墓’라고 새긴 비석이 있고, 추담의 비석은 없다. 그러나 묘 앞 쪽 문신석은 크기가 동자상만 하여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끼가 끼인 점으로 보아 이 석물은 부인들 묘의 석물이었으나, 그 후 추담의 의대를 모시면서 그대로 세운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신도비는 화강암으로 김조순(金祖淳)이 짓고, 이상근이 글씨를 썼다. 멀리 정(鄭)포은의 산소가 바라다 보이는 추담의 묘는, 의절(義節)의 외로운 혼들이 세월을 뛰어 넘어 왕래하는 듯하다.



김성태/경기예총 수석부회장. daum.net자료참조. 요약정리






기사등록 : 2006-01-07 08:53:49
                      
충절의 향기-삼학사(三學士) 윤집(尹集)
2005.12.21~12.25일 까지 성남타임주 주관으로 삼학사추모제와 삼학사중수비가 보관된 전시장, 삼학사재중수비가 건립된 중국심양의 발해대학을 다녀온바 있다.
나라사랑의 충절이 더욱 간절한 오늘, 삼학사의 역사적행적을 요약이나마 되돌아 보는것도 현대인의 애국관에 새로운 성찰의 계기가 될것이다.


윤집[尹集]
1606(선조 39)~1637(인조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병자호란 때 청과의 화의를 반대한 3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성백(成伯), 호는 임계(林溪)·고산(高山). 아버지는 현감 형갑(衡甲)이며, 형이 남양부사 계(棨)이다. 어려서 아버지가 죽자 형과 함께 공부했다. 1631년(인조 9)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설서·이조정랑·부교리 등을 지냈다. 1636년 교리로 있을 때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선을 속국시하며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하자 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 등과 함께 사신을 죽이자고 주장했으며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던 최명길(崔鳴吉)·이민구(李敏求) 등을 탄핵했다. 그러나 이듬해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 항복을 하며 화의가 성립되고, 청나라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주장하자 오달제와 함께 소를 올려 스스로 척화론자로 나서 봉림대군(鳳林大君)·오달제·홍익한 등과 함께 청나라에 잡혀갔다. 1637년 4월 심양(瀋陽)에 도착한 뒤 고문과 회유에 굴하지 않고 항변하다 심양성 서문(西門) 밖에서 오달제와 함께 처형당했다. 광주(廣州) 절현사(節顯祠), 강화 충렬사(忠烈祠), 고령 운천서원(雲川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묘표

소재지:충남 부여군 내산면 온해리

윤집은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남원, 호는 임계(林溪),현감인 형갑(衡甲)의 아들이며, 남양부사로 근왕병을 이끌고 참전하다 전사한 윤계(尹棨)의 아우이다.
최명길(崔鳴吉)이 화의(和議)를 주장하자 "화의를 주장하는 자는 목을 베라"고 상소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다가 척화파로 지목되어 심양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선생의 부인인 안동 김씨는 당시 척화파(斥和派)의 거두인 예조판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조카딸이다.



신도비

소재지:충남 부여군 내산면 온해리
묘소 바로 아래에 1975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고 옆 마을에 지금도 후손이 살고 있다.
윤집은 청나라로 압송되어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심문하면서 척화(斥和)를 제창한 사람을 대라고 하자,"죽는 것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다. 내가 내 머리를 이고 왔으니 잘라야 할 것이면 즉시 자를 일이요 다른 말을 말라"고 하였다.
뒷날 효종 임금은 윤집의 가문에 대하여 "할아버지 윤섬,큰손자 윤계, 작은 손자 윤집은 삼절(三節)이니 참으로 귀하구나"하고 충절을 기렸다.



윤집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김성태/경기예총 수석부회장,daum.net자료참조. 요약정리

기사등록 : 2006-01-07 08: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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