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1881 - 1973)가 생전에 남긴 작품 수는 5만 점 정도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유화가 1885점이고, 복제가 가능한 판화, 조각, 도자기의 작품 수가 많습니다.
그중 도자기 그림(도자 그림)은 약 2280점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한 도자기에 에디션이 50점 부터 500 점 짜리 까지 있으니 대략 400 점 정도의 원판 도자기 그림을 남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고대시대부터 동서양에서는 도자기를 만들고,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 위에 무늬나 문양을 새겼습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그후 오랫동안 도자기에 대해 소홀했고, 동양에서는 도자기를 생활화 시키면서 그 위에 그림도 그리고 도자기 색도 변형시켰습니다.
그런데 유럽과 동양 사이에 해상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가 대량으로 건너갔고, 유럽 귀족사회에서는 동양 도자기 수집 열풍이 불었습니다. 아울러 도자기 제작에 대한 관심도 늘어나 공장들이 활발하게 가동되기 시작했고, 훗날 일부 근현대화가들이 자국에서 생산되는 도자기 위에 그림을 그렸는데 피카소도 그중의 한명입니다.
피카소가 도자기에 그림을 시작한 것은 1947년 여름이고, 위의 작품이 첫번째 작품입니다. 그가 도자기 그림 작업을 한곳은 프랑스의 도자기 도시인 발로리(vallauris)인데, 당시 그는 '평화 운동(peace movement)'에 참가하면서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발로리 성당에 <전쟁과 평화>라는 대형 벽화를 그렸습니다.
피카소는 자신의 조국 스페인에서 발생한 내전때문에 조국에 등을 정도로 평화에 대한 신념이 투철했기에, 한국전쟁에서 벌어지는 살상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한국의 평화를 특별히 염원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쟁과 평화> 벽화 중 평화 부분에 한국을 상징하는 태극문양을 그렸고, 그 당시 <한국에서의 학살>을 유화로 그렸습니다.
그가 이렇게 성공적으로 그리고 오랫동안 도자기 그림 작업에 열중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마지막 연인이자 '생의 마지막 동반자'인 쟈클린 로끄(위의 그림)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쟈클린 로끄는 피카소 보다 40년 연하인데, 발로리에 있는 도자기 공장 관리인의 조카로서 공장의 뒷일을 돌보는 젊은 이혼녀였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피카소에게는 자신과 같은 여인의 헌신적 뒷바라지가 필요하다며 적극적으로 매달렸고, 피카소가 80살이 되던 1961년에 결혼신고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좋은 작품을 남길 수 있도록 내조를 했고, 피카소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위의 작품을 비롯해 여러 점을 그렸습니다.
피카소가 어린 아이때 부터 소질을 보이자 그의 아버지는 그가 14살 때, 문화의 도시인 바르셀로나의 론잔 미술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듯 스페인의 거의 모든 미술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스페인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조국일 뿐 아니라, 19살 때인 1900년에 바르셀로나에서 화가로서의 첫 전시회를 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번듯한 화랑에서 전시회를 연것이 아니라 바르셀로나 뒷골목에 있는 선술집에서 150점의 스케치를 전시한 것이지만, 그는 그렇게 전시회를 하고 정식으로 화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천재적 재능을 가진 그에게 바르셀로나는 너무 좁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시회를 끝낸 후 유럽화단을 쥐락펴락하는 화가들이 모여있는 프랑스의 몽마르트로 가서, 그곳 빈민촌에서 폴 고갱, 고흐, 드가 등과 어울리며 그의 청년기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수많은 여자들이 등장하고, '여자가 바뀔 때 마다 그림의 화풍이 달라진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여자와 그림에 열정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의 예술적 영감은 그 여인들과의 열정에서 얻어진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의 첫번째 연인은 페르낭드 올리비에라는 여인으로 피카소와 같은 나이였습니다. 스무살 때 만나 사랑을 했는데 그녀는 '야성형 여인'으로, 피카소는 이 시기에 그 유명한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렸습니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현대미술에서 입체파의 출현을 알리는 작품으로, 그때까지의 그림이 평면적 관점에서 그린 작품이라면 이 작품은 기하학적인 입체감을 표현한 새로운 표현방식이라, 당시의 많은 화가들과 평론가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그는 첫번째 연인인 페르낭드를 위해 1908년에 <부채를 든 여인>을 그렸습니다.
피카소의 두번째 연인은 에바 구엘이라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청순가련형' 여인으로 피카소가 매우 정열적으로 사랑을 했습니다. 1912년 피카소는 에바를 위하여 <옷을 벗은 에바>를 그렸는데, 그녀가 병이 나자 그는 잠시 다른 여인을 사귀어, '여자가 곁에 없으면 못 산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심하게 여자에게 집착을 했습니다.
피카소의 세번째 연인은 발레를 하는 올가 코홀로바라는 여인이었습니다. 러시아 출신으로 당시 25살이었던 그녀는 귀족적 풍류를 즐겼고, 피카소는 그녀를 따라 파리의 상류사회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당시 그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추구하던 입체파 풍의 그림을 버리고 '상류사회 사실주의' 풍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친구들에게 '배반자'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피카소는 1917년 다른 연인들에게도 그랬듯이 그녀를 모델로 해서 <안락의자에 앉은 올가>를 그렸습니다. 그리고는 그녀를 떠났습니다.
피카소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딸을 한명 낳았지만, 그녀가 너무 천진난만해 품위가 없다는 이유로 훌쩍 떠났습니다.
<게르니카>는 히틀러가 스페인의 프랑코 총통을 돕기 위해 바스크라는 작은 마을을 융단폭격해 7천명의 주민 중 1천명을 무자비하게 죽인 사건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독재와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는 대표작입니다.
피카소는 이 작품을 당시 연인이던 도라의 도움을 받으며 한달만에 완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얼마후 또 다른 여인을 만나 그녀에게서 떠났고, 그녀는 그 충격으로 정신착란에 이르렀습니다.
그녀는 스물 한살 때인 1941년 피카소를 만났는데, 법학대학을 나왔지만 당시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했을 때라 법학을 포기하고 미술 석사 과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집안이 부유했고 그녀의 부모는 딸에 대한 기대가 컸기에 피카소와의 연애를 심하게 반대했지만, 그녀는 1944년 집을 나와 63세의 피카소와 동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피카소가 그녀의 친구와 바람을 피자, 그녀는 피카소에게 결별을 선언합니다. 피카소는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여인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당황하여 '네가 떠나면 나는 자살을 하겠다'고 '협박'을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바로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방법'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그리고 피카소와의 사이에서 난 자식들을 피카소 호적에 입적시켜, 그가 사망한 후 많은 유산을 상속받게 했습니다.
그렇게 그를 떠났는데도 피카소는 그녀를 잊지 못하고 훗날까지 그녀의 모습을 그렸으니, 이것이 피카소의 인간적인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피카소가 80세 때인 1961년에 젊디 젊은 쟈클린과 결혼신고를 하자 세상 사람들은 다시 한번 그의 화려한 여성편력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세계 각국의 언론에서는 앞을 다퉈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세상의 눈길을 아랑곳 하지 않고, 도자기 공장에서 일했던 경험을 잘 살려서 피카소가 도자기 그림에 심취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습니다. 그래서 피카소는 말년에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도자기 그림을 많이 남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피카소의 말년을 함께한 쟈클린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자신에게 남겨져있던 상당수의 도자기 그림들을 피카소가 첫 전시회를 열었던 바르셀로나에 있는 '피카소 박물관'에 기증해서 헌신적인 남편 사랑을 다시 한번 세상에 보여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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